글나라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어명에 따라 가장 유능한 글을 재상으로 삼기 위해서다.

  ‘짧은 글’이 운을 뗐다. “짧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자 ‘재미있는 글’이 나섰다. “지루한 글은 죄악이라네.”
  옆에 있던 ‘알찬 글’이 외쳤다. “정보는 곧 국력이라는 사실도 모르나.”
  ‘힘센 글’이 맞받아 쳤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은 자연의 섭리일세.”
  ‘부드러운 글’이 들고 나왔다. ‘而柔克剛’(이유극강 :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
  다들 그럴듯한 논리를 들고 나오는 터라 미처 기준을 정하지 못했던 임금님이 당황하고 말았다.
  “허허… 이렇듯 쓰임새가 다양하니 내 누굴 고를꼬. 재상 자리는 단 하나뿐인데….”

  좋은 글, 유능한 글이 무엇인지는 쪽 집어 단언하기도, 또 그것을 한꺼번에 취하기도 어렵다. ‘짧은 글’은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준다. 술술 내려가는 눈길이 부담스러울 리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글’은 읽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글이다.

  반면, ‘지루한 글’을 만나는 눈길은 한없이 애처롭기만 하다. 정처 없이 헤매다가 한 두번 더 눈길을 뿌려 보지만 금새 실망한 채 결론만 챙긴다.

  그렇다고, ‘짧은 글’, ‘재미있는 글’들이 꼭 오래도록 남는 것도 아니다. 의외로 ‘책을 덮으면 잊혀지는 글’들도 많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글’들은 다시 여러 종류가 있다. ‘신선한 지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글’,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글’, ‘감동으로 가슴을 찡하게 하는 글’들이 그것이다.

  나서기 싫어 어명을 마다한 채, 초야에 묻혀 사는 ‘무림의 고수 글’들도 의외로 많다. 복잡한 권법을 싫어하는 ‘간단한 글’, 군더더기 없는 초식이 전개되는 ‘깔끔한 글’, 대중화를 지향하는 ‘쉬운 글’ 등은 결코 만만찮은 내공의 소유자들이다.

  반면, 한 번의 동작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복잡한 글’, ‘주렁주렁 치장하는 너저분한 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사는 ‘어려운 글’들은 사람들이 꼬이지 않아 후계자 양성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들이다.

  일반 백성들 틈바구니에서도 나름대로 인정받고 사는 글들도 제법 눈에 뜨인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정감 있는 글’, 가감 없이 진솔하게 전개되는 ‘솔직한 글’, 어려운 말 싫어하는 ‘평이한 글’들은 찾는 손길이 꾸준한 스테디 셀러들이다. ‘책을 덮으면 남는 것이 생기는 글’, ‘덮자마자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글’, ‘“오호”하는 감탄사가 절로 새어 나오는 글’, ‘“이런”하는 비아냥이 그냥 흘러나오는 글’, ‘“장난 아니네”라는 생각이 드는 글’,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하는 글’들은 우리에게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일러주는 ‘표지판 글’들이다.

  글나라 백성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면 내세울 수 있는 글들로는 ‘내용과 글쓴이 모두 기억나는 글’, ‘내용은 잊어도 글쓴이는 챙기는 글’, ‘내용도 글쓴이에 대한 관심도 모두 없는 글’들을 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밑줄 치는 글’, ‘각주 다는 글’, ‘수첩에 옮겨 적는 글’, ‘오려내 보관하는 글’, ‘책장 귀퉁이를 접게 하는 글’, ‘한번쯤 되뇌어 보는 글’, ‘가슴 속에 품는 글’, ‘머리 속에 담는 글’들은 스타 지망글들에게는 또 다른 우상들이다.

  반면, ‘글쓴이조차 관심 없는 글’, ‘스스로 무시하는 글’, ‘할 수 없이 쓰는 글’, ‘중언부언하는 글’, ‘술 먹은 글’, ‘못 배운 글’, ‘아는 척 하는 글’, ‘베낀 글’, ‘두서 없는 글’, ‘짜깁기 한 글’, ‘초치기 한 글’들은 다시 만나서는 곤란한 부류들이다.

  글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여러분들은 어떤 글이 되고 싶은가? / 심훈(언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