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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가을 억새정일근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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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12.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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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억새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고개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요즘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잘가라 손 흔드는 안타까운 이별의 장면이나, 애인이 집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오래 오래 지켜보는 남자를 목격하는 일이나, 송별회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마치 오래된 추억의 명화처럼 잊혀진 장면 같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마도 당연한 풍경일 지 모릅니다. 그 안타까움, 그 재회를 기약하는 뜨거운 이별의 슬픔 대신, 24시간 핸드폰만 누르면 언제든지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디지털 카메라 스틸사진은 물론 동영상 채팅까지 가능하며,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오늘 저녁에 어떤 친구를 만났는지, 뭘 먹었는 지 까지 알 수 있으니까요. 언제부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끈끈한, 축축한, 그 무언가가 빠졌을까요?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지 않고,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지 않는 이별에 無感한 시대에 시 속의 <가을 억새>처럼 헤어질 때 깨끗한 눈물을 흘리며 손 흔들어 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헤어질 때는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라도 건네거나 축축한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습니다.   오늘은 2000년대식 디지털식 이별이 아닌 1980년대식 아날로그식 이별이 그리운 가을의 마지막 날입니다. / 이인자 (국문 97년 졸업,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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