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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엽편소설 속의 하이쿠
이현준 작가  |  skdak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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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5.14  1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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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지, 제이는 혼잣소리를 했다. 하긴 주정뱅이 말을 믿은 것 자체가 우스웠다. 상식적으로도 주택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는 골목에 카페 따위가 있을리 만무했다. 거참, 대단한 이야기꾼이네. 늦은 새벽, 제이는 혼자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바로 전날 밤의 일이었다. 술집에서 후배와 소주잔을 기울이던 제이는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한남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우연히 엿들은 남자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남자는 며칠 전 춘천여고 뒤편의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고 놀랍게도 <꾸오레>라는 카페 간판을 봤다고 했다. 깜박거리는 붉은 빛을 헤집고 들어간 카페에서 남자는 절색의 여자를 봤다는 것이다. 이미 흥분한 남자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얼굴, 목소리, 웃음, 옷차림 등을 온갖 형용사를 동원해 표현하고 있었다. 에이, 설마……. 제이는 남자의 이야기에 피식 웃고 있었지만 그 유치한 형용사에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그날 밤 히잡을 쓴 카페 여주인은 여지없이 제이의 꿈속에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거길 가봤단 말이야? 거긴 네가 늘 지나다니는 곳이잖아?”

제이의 친구는 낄낄대고 웃었다. 친구는 춘천여고 근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제이가 그런 순진한 짓을 했다는 것이 재미있는지 바닥을 구를 듯이 웃어댔다. 잠시 후, 제이도 웃기 시작했고 그 작은 소동은 그렇게 정리되고 있었다.

한 달 후 제이는 산책을 하다 작은 종이 하나를 주웠다. 색이 누렇게 바랜 영화티켓 크기의 종이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시절의 보물찾기가 떠올라 제이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한참을 살펴보던 제이는 세 줄의 문구를 발견했다.

이 숯도 한때는 / 흰 눈이 얹힌 / 나뭇가지였겠지 - 타다토모

제이는 단 세 줄의 시에 머리를 망치에 맞은 듯 멍해졌다. 언젠가 접해 본적이 있는 하이쿠가 분명했다. 일본의 것이라 애써 외면했었는데, 어떤 좋은 하이쿠는 제이의 마음을 몇 번씩 접었다 폈다 할 정도로 훌륭했었다. 제이는 조심스레 종이를 지갑에 넣고 기분이 좋아져 혼자 히죽 거리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일주일 후, 늦은 시간 귀가하던 제이는 귀신에 홀린듯 등골이 오싹했다. 춘천향교 근처에서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꾸오레란 단어를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이는 꾸오레를 향해 차를 돌렸다. 차가 엔진소리를 내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고, 분명 <꾸오레>란 붉은색 간판이 언젠가 술집 남자의 말처럼 수명을 다한 형광등처럼 깜박깜박 빛나고 있었다. 쿵쾅쿵쾅, 제이의 심장이 불빛의 리듬에 맞춰 출렁거렸다.

제이는 라일락에 둘러싸인 낯선 카페를 보며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어쩌면 당연한 고민이었고, 이 짧고 긴 고민 속으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초대장이 있으시네요. 들어오세요.”

깜짝 놀라 바라 본 곳엔 붉은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있었다. 흐흡, 신음소리에 가까운 감탄사가 여자의 미모에 놀란 제이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여자는 웃었고 제이는 굳었다. 초대장? 그런 건 없었지만 제이는 어느새 카페에 들어가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메뉴판엔 <꾸오레>라는 정체모를 메뉴 하나뿐이었다. 이내 여자는 커다랗고 붉은 머그잔에 차 한 잔을 내왔다. 마치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도통 무슨 맛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여자는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런 말이 없었고, 제이는 줄지 않는 꾸오레를 홀짝홀짝 마시며 여자와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짧고 긴 시간.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때르릉.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제이는 평소처럼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제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학교에 가며 제이는 일부러 카페가 있던 언덕길로 에돌아 갔다. 카페가 있던 자리엔 당연한 듯 3층짜리 원룸 건물이 서 있었고, 제이는 생각난 듯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곳엔 또 다른 하이쿠 한편이 쓰여 있었다.

나비 한 마리 / 절의 종에 내려앉아 / 졸고 있다 - 부손

제이가 종을 치자 사라진 나비 한 마리. 그 존재가 졸고 있었던 때가 더 나은지, 그렇지 않은지 제이는 모른다. 제이는 언제 다시 초대장으로 쓰일지 모르는 색 바랜 종이를 다시 지갑에 조심스레 넣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비야, 나비야, 한번만 더 종이 위에 앉아다오.”

/ 이현준(소설가, 現철학과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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