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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하루] 진추하, 라디오의 나날
이현준 작가  |  skdak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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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3.21  20: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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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추하, 라디오의 나날
                                                                        - 유하

     둥글게 커트한 뒷머리, 능금빛 얼굴의
     여학생에게 편지를 썼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신청곡은 졸업의 눈물, 사랑의 스잔나 진추하가
     홍콩의 밤 열기를 담은 목청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그 여학생은 내게 능금빛 미소만을 쥐어주고
     달아났다, 금성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기다리며 서성이던 날들, 폴 모리아
     질리오라 친케티, 사이몬 & 가펑클, 모리스 앨버트
     그리고 한 순간 수줍게 라디오를 스쳐가던 그녀
     그와 함께 진추하를 듣고 싶어요, 그 작은
     라디오의 나라 가득히 드넓은 한여름 밤과
     무수한 잔별들이 두근두근 흘러들어오고 난
     그녀의 흩날리는 단발머리를 따라 새벽녘의 샛별까지……
     그렇게, 열다섯 살의 떨림 속에 살던 나와 그녀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건전지처럼 업혀 있던 그 풋사랑의 70년대도,
     퇴락한 진추하의 노래를 따라
     붉은 노을의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으리



‘트랜지스터라디오’라는 단어에 먼 기억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작은 라디오 하나를 선물해 주셨다. 10년 넘게 아버지가 쓰시던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마다 내가 몰래 가져다 듣던 것을 진즉에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른 손바닥 보다 조금 더 큰 그 작은 라디오는 제 둥치보다 세배는 더 굵은 건전지를 제 등에 업은 채 내게로 왔다. 건전지 아껴 써라, 아버지 말씀에도 난 방송이 끝날 때까지 라디오를 켰고, 내 용돈의 절반이 건전지를 사는데 사용되곤 했다. 시 속의 진추하는 이미 내 세대 이전의 가수였지만, 여전히 그녀가 부른 노래는 라디오 단골메뉴로 흘러나오고는 했다.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사랑의 스잔나’의 영화음악이었던 ‘한 여름 밤'이 나올 때면 온몸에 힘이 풀려 멍하니 한참을 앉아있고는 했다. 전설의 음악방송이었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라는 TBC의 방송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달래곤 했었다. 그러다 혹 낯선 채널이 희미하게나마 잡음과 함께 잡히면 난 어딘가 있는 4차원의 세계에 맞닿은 것이 아닌가 두근거리며 귀 기울이고는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면서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머니가 삐까뻔쩍 눈부신 오디오세트를 샀고, 큰누이가 소니 워크맨을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사줬다.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눈을 피해 이불속에서 노래를 뱉어냈던 것은 내 작은 금성 트랜지스터라디오였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엽서를 보내는데 열중하고는 했다. 멋진 가명을 짓고, 문방구 앞에서 삼십분을 넘게 쪼그리고 앉아 고른 예쁜 엽서에, 시집에서 따온 간드러지는 문구를 섞은 사연을 적어, 여학생들이 많이 타는 버스정거장 앞 우체통에 천천히 엽서를 넣고는 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큰소리로 ‘몇일 방송에 나올 거야’라고 소리치듯 말하고는 힐끔 내가 좋아하던 여학생을 치어다 봤다. 하지만 녹음을 하기 위해 책상 밑으로 워크맨의 녹음버튼에 손가락을 얹고 있던 나는 단 한 번도 내 사연을 녹음하지 못했다.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녹음 테잎을 드밀며 프로포즈하려 했던 계획도 그렇게 벌써 십 수년 전의 일로 흘러가 버렸다.


난 유하의 ‘진추하, 라디오 나날’이란 시를 읽을 때면 내 학창시절의 일들을 이렇게 싫건 좋건 고스란히 떠올리게 된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유하의 시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난 시 한편만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에 비 내리는 필름을 돌리게 하는 그가 영화감독이여서 참 좋다. 물론 잘 모르겠다. 나에겐 그저 술술 풀리는 이 시가, 어린 친구들에겐 난해한 시처럼 보일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이번일로 난 새삼 진추하의 곡을 틀어놓고 몇 번째 이시를 읽고 있다. 그리고는 말한다. 어쩜, 이런 시가 있구나, 라고.

/ 이현준(소설가, 국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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