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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 러시아의 체홉과 한국의 체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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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10.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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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홉의 희곡들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거기에는 우수어린 표정이 있고 밝은 미소가 있으며, 뼈저린 고독이 있고 멀리 보이는 빛이 있다. 거기에는 냉철한 과학적 엄정성이 있고 따뜻한 인간적 연민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치 아름답고 슬픈 현악육중주의 섬세한 선율처럼, 저마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잔잔한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러시아 극단의 체홉 공연과 한국 극단의 체홉 공연이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1990년에 러시아의 말리극장이 내한하여 「벚꽃동산」을 공연하였다. 이 공연에 대하여 한국의 연극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러시아 배우들의 슬픔을 억제하는 내면 연기와 과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들이 이루어내는 전체적인 앙상블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에 앞서 소설가 이태준은 1934년에 서울에서 극예술연구회의(이하 극연) 「벚꽃동산」을 관람하고, 1947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벚꽃동산」을 관람한다. 그는 두 공연을 비교하면서 모스크바에서의 관람이 자연스러운 연기에 대한 ‘도취의 밤’이었노라고 감탄하는 글을 남기었다. 우리나라 극연의 공연은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안영일은 극연의 「벚꽃동산」은 외면적인 계급 대립을 재현하는 데에만 급급하였고 등장인물의 내재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안드레예브나 역의 모윤숙과 그녀의 딸 아냐 역의 노천명의 연기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체홉은, 그의 「벚꽃동산」에서, 사회의 계층구조가 재편성되는 혼란기에 놓여 있는 각 계층의 인물들, 즉 안드레예브나나 가예프처럼 몰락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하는 인물들, 로빠힌이나 뜨로피모프나 아냐처럼 새 시대의 인물로 떠오르는 신흥부유층이나 진보적 지식인들, 피르스처럼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소외되는 계층의 인물 중에서 어느 계층이나 어느 인물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객관적이고 엄정한 사실주의 정신이다. 한국의 연출가는, 그러나, 어느 편을 들고 만다. 이것은 네 편 아니면 내 편 둘 중의 하나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의식의 발로라 할 것인가.

  러시아의 배우들은 관객을 속이는 방법을 안다. 그들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그들끼리만 이야기한다. 그들은 자기감정을 안으로 숨기는 방법을 안다. 러시아의 배우들이 정치를 하거나 외교 활동을 하면 모두들 성공할 것이다. 어쨌든 러시아의 배우들은 관객을 모른척하면서 어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삼킴으로써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읽어내게 한다. 한국의 배우들은, 그러나, 관객을 속일 줄을 모른다. 그들은 관객을 의식한다. 분명히 배우들끼리 대화하여야 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버릇처럼 관객을 향하여 말한다. 연기문법의 초보부터 어긋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적 천진성의 발로라 할 것인가. 한국의 배우들이 정치를 하면 모두들 실패할 것이다.

  인간세계의 외면적 대립을 표현하는 데에 급급하여 결국은 체홉 연극의 정수인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실패한 것은 1934년 극연의 「벚꽃동산」에 한하지 않는다. 한국에서의 체홉 공연은 대부분이 똑같은 방법으로 실패한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그 동안 한국 극단이 공연한 50여 번의 체홉 공연 중에서 성공적인 공연이라고 평가된 공연은 거의 없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70여 년 동안 한국의 연극평론가들은 똑같은 목소리로 체홉 공연을 비판한다. 내면 연기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영원히 교정이 불가능한 결점일지도 모르겠다. 70년이 걸려서도 고쳐지지 않은 결함이 100년이 걸린들 고쳐지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한국 연극인에게 체홉적인 사실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 연극인에게 중국 경극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체홉 공연이 실패한 것은 우리가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홉의 작품을 우리식의 공연 양식으로 바꾸어서 공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곡과 폭소와 신명을 섞어서 연출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체홉 공연은 영원히 실패할 듯하다.

/ 전신재(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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