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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 하루] 아릿한 핏물이 들다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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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3.28  16: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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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

-유안진

 

더이상은 도저히

깊어질 수 없이 깊어진 가을밤

끝까지 남아서

혼자 남아서

목을 놓아버린 풀버러지 울음곡조

받아쓰고 쓰다니

 

사랑아

캄캄 어둠에다

마지막 쓴

혈서(血書) 한 통

필생의 절명싯귀(絶命詩句)

낙엽의 얼룩반점.

 

아릿한 핏물이 들다

 

작년 봄이었던가. 어머니는 주인이 떠나 창고처럼 쓰이고 있던 내방 베란다를 대대적으로 정리 해 달라 요청하셨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구석진 그곳을 어머니는 곡물창고로 쓰실 요량이셨던 것이다. 나는 케케묵어 귀퉁이가 다 해어진 라면박스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구석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그 박스들을 여는 순간 나는 베란다 정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자들이 주저리주저리 나의 옛날이야기들을 꺼내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에서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검붉은 색 글씨가 선명한, 코팅된 한 장의 편지지였다. 당시에는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편지 따위를 코팅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니 아마도 나는 그 종이를 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편지지엔 줄 쳐진 칸과 상관없이 큼지막하게 '당신을 위해!'라고만 쓰여 있었다. 손가락에 물감을 찍어 아무렇게나 써낸 것 같은 그 글씨를 보며 나는 모든 것에 무람 없던 나의 한때를 떠올렸다. 10년도 훨씬 넘은 일이건만 나는 순간 손가락 끝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당시 나는 사춘기의 강한 마력에 푹 빠져 있었다. 사춘기가 네 번의 봄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정말 네 번의 봄이 가도록 사그라지지 않는 내 불타는 봄에 힘겨워했다. 어쩌면 오춘기 정도의 질긴 시기를 보내던 사내아이는, 분명히 반쯤 미쳐있었다. 어머니가 당신의 순한 아들은 '진정 사춘기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내 사춘기는 철저히 내 안으로 수렴되기만 했다. 나는 혼자 할 수 있던 모든 일탈의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수음은 너무나도 지겨웠으며, 돼지본드는 좆나 빨리 굳었으며, 부탄가스는 열라 급히 사라져갔다. 문제는 나의 이런 행동이 철저히 혼자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었다. 학교에서는 교리반 학생이었으며, 외방선교회 신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으며, 매학기 친구들이 추천한 선행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부탄가스와 돼지본드를 섞은 칵테일 비닐봉지를 코에 가져다 대면서도 철저히 나 자신을 통제했던 나를 두려워했다.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치지 않았던 나는, 그런 친구들이 어린아이 같고 몹시도 우스웠다. 나는 뭔가 강력한 내 사춘기의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건 자학을 수반했고, 그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이 바로 붉디붉은 '혈서'였다. 내 손가락 끝에 깊이 박힌 커터칼, 그것이 당시 내 마음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처음 내가 손가락 끝을 조심스레 카터칼로 긋기 시작한 것은 고3 여름이었다. 공부에 열중하자며 시작했던 혈서 쓰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혈서의 내용보다는 내 손가락 끝을 자르는 것에 집중했던 것이다. 카터칼과 일회용 주삿바늘, 그리고 헌혈을 할 때 얻은 작은 채혈용 칼날을 이용해 손끝에서 나오는 핏방울을 주시했다. 나중에는 접시에 피를 모아 작은 붓으로 혈서를 쓸 정도였다. 아릿한 느낌이, 통증이 아닌 쾌감으로 오던 그때,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울려 퍼지던 가을 축제에서 한 여학생을 보았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운명 같은 사랑에 빠졌다고 확신한 나는, 그 뒤로 다시는 본적도 없는 그 여학생을 위해 적잖은 시와 혈서를 써내려갔다. 더 이상 유치할 수 없었던, 그 가을의 나의 행각은, 사춘기의 봄이 더는 오지 않았던 이듬해 봄에 자연스레 끝이 났다. 어느새 나는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그래서 '너는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지인의 충고를 듣는 그런 불행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내 방 베란다의 구석에서 발견한 그 오래된 혈서 하나가 나의 오감을 자극하고 있다. 내 오래전 광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나는 사춘기의 봄이 다시 오지 않을까 내심 바라고 있다. 그때는 필생의 절명 소설 한편 써 낼 수 있지 않을까하며, 난 두려움으로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다.

/ 이현준 (소설가 ․ 국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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