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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견문록] “세기말 폭력 만화가 현실이었다”사무라이의 두 번째 이야기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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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17  10: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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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199X년의 지구. 기존의 질서와 도덕은 모두 붕괴되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만이 철저하게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가 온다. 세상을 힘과 폭력으로 지배하려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준동(蠢動)하고, 그들 아래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가슴에 7개의 흉터를 지닌 ‘북두신권’ 권법의 계승자, 켄시로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길을 나선다.

   

사진 설명 모두 27권이 출간된 일본 만화책, 「북두의 권」(北斗의 拳)은 한국에서 「북두신권」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사진은 일본판 「북두의 권」의 단행본 표지.


1983년 주간 만화잡지 ‘소년 점프’에 소개된 이래, ‘소년 점프’의 판매 부수를 80만부나 끌어올린 「북두의 권」(北斗の拳)은 일본 만화 사상 최초이자 세계 만화 사상 최초로 1억 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 셀러였다. 그런 「북두의 권」은 또한, “너는 이미 죽어 있다”라는 명대사와 함께, 인체 절단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함으로써 세간에 숱한 화제를 뿌린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북두의 권」에서 그려 낸 잔인한 세계가 단순히 만화적인 허구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난 800년간 사무라이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일본의 역사가 기실, 「북두의 권」의 실제 배경인 까닭에서다.
158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역사상 최초의 ‘칼 사냥’을 실시한다. 쇠붙이를 지닌 자는 누구든 왕좌를 넘보던 120여 년간의 혼란한 전국 시대를 평정했기에 더 이상은 무기가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전국 시대 당시, 농민과 사원, 마을과 촌락들은 살아남기 위해 칼과 창, 활과 총포로 무장한 채, 곳곳에서 광포하게 날뛰던 사무라이들과 대치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두 번째 ‘칼 사냥’을 실시한다. 세키가하라(関ケ) 전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 측을 완파한 후, 도쿠가와 중심의 천하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도쿠가와 막부의 운이 다한 19세기 말. 이번에는 메이지 유신을 앞세운 신정부가 다시 ‘폐도령’(廢刀令)을 실시한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지배 계층인 사무라이의 특권 의식을 박탈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더 이상 칼을 차지 못하게 된 사무라이들은 할복 자살하거나 정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남은 자들은 목검이나 칼집만 차고 다님으로써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한다.

칼은커녕 붓 단속조차 이뤄진 적이 없는 한반도와 달리,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칼 단속만 세 차례에 이를 정도로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나라. 그런 일본은 예로부터 칼로 흥하고 칼로 망해 온 ‘사무라이의 나라’다. 해서, 칼로 상징되는 군국(軍國) 문화는 일본인들의 머리 속 깊숙이 자리잡은 생존 코드이자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었다.

붓과 종이에 기반하기보다 창과 칼에 의지하다 보니 법보다 주먹이 효율적인 통치 수단으로 대접 받은 것은 당연지사. 그 같은 이유로 분쟁의 사적 해결을 금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가한 처벌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를 들어, 1592년에 관개용수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다가 치안령을 위반한 셋슈 마을 사람들의 비극은 지금도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물을 두고 분쟁을 벌이는 바람에 83명의 농부들이 처형되었다. 싸움을 금지하는 명령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13세의 어린아이도 아버지 대신에 처형되었다.” (「사무라이의 나라」, 237~238쪽)

사무라이 역시, 이러한 폭압에서 예외일 리 없었다. 17세기, 가가(加賀) 지방의 영주 마에다 도시쓰네(前田利常)는 “다른 지역의 사무라이와 벌이는 싸움과 말다툼에 관해서는 시비에 관계없이 처형한다······어떠한 경우에도 인내가 최선이다. 비록 면목을 잃어도 그것이 치욕은 아니다······잘 인내하는 사람은 신뢰를 얻을 것이다”라는 포고령을 선포했다. 안타깝게도 포고령이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칼질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한 사무라이들이었기에, 마냥 참기만 하는 이를 신뢰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647년, 오카야마(岡山)에서 벌어졌던 일화는 그렇게 칼에 기댄 정치 철학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설명 지금도 벼룩시장에 나가 보면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골동품 가운데 하나가 ‘쯔바’라 불리는 손 보호용 ‘검막이’다. 사진은 유락초(有楽町) 역 ‘도쿄 국제 포럼’ 앞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에 칼과 ‘쯔바’를 내놓은 어느 상인의 장터.

어느 공휴일, 사무라이들이 성에 나왔다. 오기와라 마타로쿠로(荻原又六朗)가 동료 이코마 겐바(生駒玄畜)에 대해 ‘여러 가지 비난’을 쏟아냈다. 두 명은 이미 오랫동안 견원지간이었던 것이다. 겐바는 나중에 성에 나와 마타로쿠로가 자신을 험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인내’하여 성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은 본질적으로 사소한 일이었지만 공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마타로쿠로는 중상(中傷)이라는 나쁜 품행을 범했다는 이유로 할복 자살을 명 받았다. 겐바의 태도는 영주가 있는 역내에서 인내의 모범으로 칭찬받았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은, 그에 대한 처벌이 지극히 가혹했다는 것이다. 당국은 그의 토지와 직위를 몰수했는데 판결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겐바로서도 마땅한 행동을 해야 했는데, 너무나 원만한 대응이기 때문에 젊은 영주를 시중드는 사무라이의 태도로서는 불충분하다. 동정이 가는 바이기는 하나 재산 몰수에 처한다······이 결정 이후, 다툼이 일어나면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이런 경우는 ‘이렇게 하라’고 법으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사무라이의 나라」, 320~321쪽)

해서, 모욕 받은 자신들의 주군(主君)을 할복 자살에 이르게 한 정부의 고위 관리를 47명의 사무라이들이 살해 했을 때, 도쿠가와 정권은 양측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만 무려 3개월 간의 법리 논쟁을 벌인다. 상사(上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최고 규범인 사무라이 사회에서 직속 상관을 위한 복수는 응징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였던 것이다. 물론, 정부 고관을 살해한 47인의 사무라이는 마침내 할복 자살하라는 명(命)을 받고 모두 할복해 죽었지만.

이후에도 칼에 의지한 군국 사회는 끊임없이 삐걱거리며 곳곳에서 로미오의 몬태규가(家)와 줄리엣의 캐풀릿가(家)를 양산해 낸다. 이와 함께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적 보복을 과도하게 규제하기 시작하자 사무라이의 공격성은 자기 자신을 향하기에 이른다. 주군의 죽음을 따르는 할복자살인 이른바, ‘준시’(殉死)가 그것이었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인 다다키치 (德川忠吉)가 죽었을 때 네 명의 가신이 할복 자살을 감행했다. 1636년, 유명한 무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죽었을 때는 15인의 사무라이들이 배를 갈랐다. 그리고 1657년, 나베시마 가쓰시케(鍋道勝茂)가 죽었을 때 가신 26인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관대했을까? 농민이나 상인이 사무라이에게 무례하게 굴면 베어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살인 면허,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이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말하자면 권총 찬 군인이 한 낮에 모욕당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쏴 죽여도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는 나라가 일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붓의 나라 조선은 일본과 달라도 너무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필화(筆禍)는 있으되, 검화(劍禍)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아니 되었던 나라. 마찬가지로, 검화(劍禍)는 있으되, 필화(筆禍)는 존재할 수 없었던 나라 역시 일본이었다. 떄문에 소설가 은 우리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우륵에 대한 「현의 노래」와 에 대한 「칼의 노래」를 썼지만 기실은 「‘붓의 노래」를 썼어야 했다는 것이 필자의 B급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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