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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책 한권] 수난과 구원의 대서사시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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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7  16: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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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방학 학보사로부터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학보사 담당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학보사에서 전화가 오면 이번에는 어떤 말로 정중하게 거절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항상 먼저 하곤 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글을 써 보도록 독려하는 선생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글이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줄지, 저 사람 글을 읽고 보니 아무런 색도 맛도 없는 사람이네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고개 숙인 망령처럼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럼의 제목이 “내 생애 책 한 권”이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나가 한 번씩은 말해보는 어린 시절 동화와 소설을 읽으며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 보았고 낯선 시대와 세계를 동경해 마지않았다는 경험은 나에게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상한 말이기는 하지만 소설은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와 시험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에게 많은 위안이 되어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거나 누군가에게 소설을 가르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에서도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는 학과에 들어갔지만 나는 자주 전공과는 상관없는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꿈꿔 왔다.

그때 우연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접하게 됐다. 사실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정해주신 책이었으므로 우연히는 아니지만, 나의 의도나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므로 내게 있어서 이것은 우연이었다. 또한, 나의 인생을 바꿔 주고 내가 문학으로 ‘먹고 살 수’ 있게 해 줬으므로 필연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을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너무도 당연히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올렸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죄와 벌>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문학적 역량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최근 한 언론사에서 명사들에게 추천받은 책의 목록을 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추천하고 있으며 관련 강연회도 열리고 있어서 무슨 뒷북치는 것 같아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내 생애 책 한 권이 분명한 것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소개하기로 하겠다. 

<죄와 벌>에서 시작된 나의 도스토예프스키 편력은 <악령>을 거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 끝을 보았다. 사람들의 비겁한 내면을 파고드는 그의 집요함이 마음에 들었고, 살인이나 폭력과 같은 범죄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 그저 감탄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작가라면 한 번 제대로 이해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살해를 둘러싼 그의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 스메르쟈코프 사이의 대립과 긴장의 이야기이다.

한 아버지 밑에서 어찌 이리도 서로 다른 외모와 성격을 가진 아들들이 태어날 수 있는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들은 모두 극단적인 개성의 소유자이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표도르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거만하고 야비한 눈빛과 눈 밑의 흐물거리는 지방 덩어리, 주름투성이 얼굴과 두꺼운 입술, 다 썩은 이빨, 툭 튀어나온 후골을 가진 표도르는 자신의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외모를 대상화시켜 기꺼이 사람들의 조롱거리를 자처한다. 그러나 그는 재산이건 여자이건 자기가 가진 것은 절대 내어놓으려는 법이 없는 탐욕스러운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초입에서 그가 살해당했을 때에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버지의 육욕과 음탕함을 가장 많이 닮은 큰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육탄전까지 가는 험악한 상황을 만들어 내며 그러한 이유로 아버지가 살해된 후 바로 살인자로 지목받는다.

차갑고 이지적인 둘째 아들 이반은 무신론자이며 이성과 합리주의의 신봉자이다. 그는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상의 사악함과 죄 없는 인간들의 고통을 보며 회의론적인 무신론자가 됐지만, 의식 깊은 곳에서는 신을 떨쳐 버릴 수 없기에 더욱 고통받는 인물이다. 이반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알료샤는 그와 정반대로 신을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 견습 수도사의 길을 걷는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젊은이로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를 통해 카라마조프 집안에 내려진 저주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려 한다.

반면 표도르와 마을의 백치 처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인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다른 형제들의 마음속 악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건 아버지 살해와 연결돼 있으며, 나름의 방법으로 아버지 죽음에 책임을 지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이반의 논문인 “대심문관의 전설”일 것이다. 사실 내용이 쉽지 않다 보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며 뛰어넘고 싶은 유혹에 굴복당하고 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 주는 핵심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죄와 벌>의 초인사상에서 시작해 <악령>의 인신(人神) 사상을 거쳐 대심문관에 이르기까지 이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자의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과 그에 대한 회의 사이의 고뇌이다.

이반의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말로 표현되는 인간 자의지에 대한 신념에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함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만, 대심문관 전설 속 그리스도는 그러한 인간마저 말 없는 키스로 끌어안고 있다. 세계 문학에서 가장 신비한 키스라고 일컬어지는 이 장면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념을 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무신론에서 시베리아 유형 후 철저하게 슬라브주의적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난을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에 깊이 천착하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에 대한 양심의 고통을 시베리아 유형으로 속죄받으려 하며, 모든 것을 허용받는 존재를 창조하고 싶었던 이반은 정신이상으로, 그의 사상을 가장 저열하게 현실화시킨 아버지 살해범 스메르쟈코프는 자살을 함으로써 모두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그리고 카라마조프 집안의 죄악은 수도사 아들인 알료샤를 통해 종교적으로 속죄받고 구원받도록 예정돼 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소설은 구원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 수난의 이야기를 할 때 훨씬 더 매력적이고 강한 흡인력이 있다. 그 어떤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의지를 가진 인간, 모든 것을 허용받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 박혜경(러시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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