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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책 한권]문자권력과 불립문자(不立文字)김근 《욕망하는 천자문》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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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05  14: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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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림책만 보다가 글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글자의 매력에 빠졌던 것 같다. 글의 정확한 뜻은 몰랐지만 더듬거리다가 웅얼대면서 글이 주는 신비하고 넉넉한 세계에서 흡족히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이런 경험이 그나마 지금 필자가 책이라도 가까이하는 서생(書生)이 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에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 글이 어떤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고 글로 인해 ‘나’는 ‘우리’가 되고, ‘현재’는 ‘미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글은 위대하고 힘을 가진 지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힘은 위험을 전제하며, 특히 보이지 않은 권력은 감추어진 만큼의 간교함으로 더 큰 위험 덩어리를 보듬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동아시아 보편문어였던 한자(漢字)와 이로 이루어진 한적(漢籍)을 들 수 있다. 중세 지식 권력이 실제 권력이던 때(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이에 제한된 공급과 유통을 통해 당대 주류층이 권력을 습득하거나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됐기 때문이다.
  
한편, 흔히 『천자문』이라고 하면 아동용 기초 한자 학습서쯤으로 생각한다. 물론 몇몇 글자들을 제외하면 쉽고 자주 사용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필자 또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급 한자 학습서라고 하기에는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나 그 이상의 의미를 탐색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필자는 대학 초년 시절, 학기가 시작될 즈음에 한자 공부를 할 요량으로 천자문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이후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익힘과 중단의 지루한 대결이 있었고 한 학기가 끝날 무렵에야 지루한 여정을 끝낼 수 있었다. 그때 얻은 생각은 한마디로 ‘불감당(不堪當)’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천자문과의 이별은 알 수 없는 아쉬움과 그리움만으로 남게 됐다.
  
이로부터 시간은 흘러 어느 대학에서 교양한자 강좌를 맡게 됐을 때, 추억의 뒤뜰에 묻어 뒀던 천자문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마 미완의 숙제를 학생들과 함께 풀어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강의 준비를 위해 여러 종류의 천자문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 익힘용 쓰기 교본에서부터 자세한 해설서까지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김근의 《욕망하는 천자문》은 그간의 아쉬움과 숙제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책을 머리맡에 두기로 했다. 강의를 하면서 예전의 단순 학습자로서가 아닌 충실한 전달자가 되기 위해 이 책과 주변 자료를 충실히 살폈다. 그렇게 지루하지 않은 교양한자의 학기, 아니 천자문의 학기가 다행히 끝났다.
  
그제야 필자는 천자문은 단순한 한자 학습용 교재뿐만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시적 구조물이요, 동아시아 지적 문화의 집적물임을 알게 됐다(물론 이외에도 독자마다 처한 독서 환경에 따라 수많은 의미들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간 필자가 천자문에 가졌던 의문을 《욕망하는 천자문》을 통해 나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천자문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한국문화가 동아시아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상호 수수의 관계였음을 인정할 때, 천자문은 동아시아 공동의 유산이자 한국의 전통문화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고전문학 전공자인 필자가 우리 문화 속에 스며든 천자문에 집착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기존에 이 책의 평자들이 말해 주듯이 《욕망하는 천자문》은 문자와 권력, 언어와 욕망,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의 조합에 관한 이론들을 동원해 자형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봉건적인 윤리관이 천자문에 어떻게 반영되고 이것이 학습자들에게 어떻게 의식화됐는가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컨대, "임금이 백성들을 아껴 기른다[애육려수(愛育黎首)]"는 전제 군주가 주체가 되는 세계관을, "부모님이 살피고 길러주심을 공손히 생각한다[공유국양(恭惟鞠養)]"는 효의 절대화를, "여자는 지조가 곧고 굳음을 사모하고, 남자는 재사와 현인을 본받는다[여모정렬(女慕貞烈), 남효재량(南效才良)]"는 남녀 본분의 차별화를 만들어 이데올로기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지적했다시피 임금과 백성은 상호 주체로서 보완의 관계이며, 효는 자발적 실천의 문제이지 체제가 강제할 일은 아니며 그리고 여성의 희생이 결코 미덕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관념들은 한국 고전 시가에도 자주 보인다. 오륜가 혹은 훈민가류 작품 가운데, “임금과 백성과 사이 하늘과 땅이로되, 나의 서러운 일을 다 알려고 하시거늘, 우린들 살진 미나리를 혼자 어찌 먹으리(정철)”, “어버이 사라신 제 섬길 일을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아 어찌하리, 평생에 다시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정철)”, “지아비 밭 갈러 간 데 밥 고리 이고 가, 반상을 들오대 눈썹에 마초이다, 친코도 고마우시니 손이시나 다르실까(주세붕)”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충, 효, 남녀유별 등은 시대 초월의 국민 윤리적 가치일 수도 있다. 필자 또한 가족, 사회, 국가적 차원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이는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는 개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다만 모종의 강압을 글자와 시로 위장해 인식이 주체에게 근본적 회의의 시간을 없앤 채, 이를 망실케 함으로써 당위적 실천만을 강요하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글은 폐쇄적 범위에서 유통되던 시대나 개명이 문명을 넘어선 지금에도 그 자체가 권력이다. 글은 우리의 사유를 돕기도 하나 억압하기도 하며, 공동체의 규범을 분명하게 알려주지만 자율행위를 스스로 억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글은 역사적으로 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의 훌륭한 도구였던 셈이다.
  
오늘 문득 아주 예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하늘 천, 따라 지, 가마솥의 누룽지 ……”가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불가에서 자주 언급된 불립문자(不立文字)도 함께.
/ 김명준(국어국문‧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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