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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재소설 - 발바닥을 긁는 아내 ③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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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10.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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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보다는 ‘환멸’이 훨씬 진보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커피를 들고 통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맞은 편 건물 옥상 위에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한 남자가 길게 목을 늘어 뺐는데 그가 건물 아래로 곤두박질 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사이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손가락을 퉁겨 옥상 밖으로 담배꽁초를 던졌다. 나는 담배꽁초가 어디에 떨어지는 지를 보려고 했지만 너무 작아 끝까지 쫓을 수는 없었다. 창 밖의 건물과 커다란 간판들 위에서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워냈다.

남은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 배가 아팠다.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 넣고 화장실로 향했다. 구내식당에서 만난 아내는 멍한 표정으로 밥을 떴다. 귀 뒤로 넘긴 아내의 옆 머리카락이 스르르 볼을 가리며 흘러내렸다. 아내는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 있잖아.

나의 말에 아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내의 손에는 젓가락이 들려있었다.

- 미안해.

각방을 쓴 이후 처음 내뱉는 사과였다. 그러나 아내는 햄 위에 오르던 젓가락을 김치 위로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내의 얼굴은 밀랍인형처럼 그렇게 한 표정만 지닌 것 같았다. 무표정. 아내가 먹지 않는 햄을 내 쪽에 쏟아 부었다. 아내는 역시 무표정이었다. 회사의 이목만 아니었다면 아내는 구내식당에서도 각자 밥을 먹길 강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내가 먹지 않는 호박전도 내 쪽에 쏟아 부었다. 아내의 입술이 오른쪽으로 약간 비틀어졌다. 픽, 경멸 한줌이 아내의 빈 반찬 접시에 떨어졌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은 사무실에 사람은 없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바로 맞은 편에 보이는 곽의 빈자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곽의 빈자리에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책상 서랍을 열었다. 뚜껑이 없는 수성볼펜 한 자루와 휴대용 티슈가 있었다. 휴대용 티슈를 꺼내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티슈를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티슈의 느낌이 아침, 아내의 허리 살을 연상케 했다.

나는 곽의 다른 서랍들을 차례차례 열어보았다. 메모지 몇 장과 쓸모 없는 서류들과 테두리에 볼펜똥이 묻어 검게 변한 낡은 자, 미처 버리지 못했을 음료수 캔 뚜껑이 보였다. 곽의 자리에 흥미를 잃은 나는 내 책상에 돌아와 볼펜 꼭지로 책상을 두들겨 댔다. 또도독, 또도독……. 볼펜 소리 사이로 웅웅거리는 에어컨 소리가 들려왔다. 편두통이 일었고 콧물이 나올 것 같았다. 헛기침을 두 번 했다. 할 일은 많은데 그다지 서류들에 손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등을 의자등받이에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침 삼키는데 약간의 곤란을 겪었지만 피가 역류하면서 머리 속이 멍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약간 피곤한 것도 같았다. 비상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다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나를 무시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다이어트 삼아 계단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의 뒷모습이 한달 전보다는 야위었다. 아내가 왜 샌들에 집착을 보이는 지 몰랐다. 샌들만 아니었다면 아내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내에게 왜 다이어트가 필요한 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아내는 내게 그 합당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기 보다는 귀찮아하거나 짜증나는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다이어트를 시작한 후부터 부쩍 말수가 적어졌고 잘 웃지 않았다. 자주 짜증을 냈고 가끔 오늘 아침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즐겼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두 대의 버스를 그냥 지나쳐 보냈다. 아내는 오늘도 늦는다고 했다. 부서 회식이 있다고 했다. 나는 늦는다는 일방적인 아내의 통보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아내의 샌들을 끊어버린 것이 어떤 문제를 지닌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샌들을 끊기 전이나 끊은 후나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말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각방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이전부터 아내의 바램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나를 작은 방에 몰아넣은 이후 좀 더 예뻐졌고 좀 더 귀가가 늦어졌다. ……또 한 대의 버스가 지나갔다……. 아내는 각방을 쓴 이후 좀 더 샌들에 집착을 보였고 냉장고에서 신경을 끊어버렸다. 내가 집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아내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내는 좀 더 고상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 아내는 고상해지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책상서랍을 뒤적거렸다. 낡은 명함들과 노트들, 영수증과 반 토막이 난 지우개, 주소 따위가 적힌 종이쪽지와 작은 봉투들, 오래된 증명사진들이 한데 뒤엉켜 난삽했다. 나는 어디에선가 정중하게 받았을 명함들을 하나씩 차근히 읽어 내려갔다. 기억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누군지 그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이가 좋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명함 교환 이후 서로 얼굴조차 보기 껄끄러워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건성으로 알게 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는 것이 으레 당연시 되어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다 읽은 명함을 방문 옆 구석에 놓인 휴지통으로 툭툭 던져 넣었다. 대부분 골인이 되었지만 몇 장의 명함들은 휴지통 모서리에 맞아 옆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너무 멀리 나가 벽에 맞아 퉁겨 나오거나 혹은 그만치 거리도 못 가서 방바닥에 떨어졌다.

명함을 다 던져버린 후 나는 방바닥에 길게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굴려 턱을 방바닥에 댄 채 뒤집혀진 서랍 주변을 쳐다보았다. 증명사진을 끌어당겨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몇 장은 대학졸업 때 찍은 사진이었고 몇 장은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찍은 사진이었고 또 몇 장은 회사 입사시험을 보던 당시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 중에서 내 눈길을 가장 끈 것은 새로운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기 위해 찍은 사진이었다. 넥타이 대신 칼라가 없는 흰색 면티를 입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 움푹 패인 내 눈의 골격이 드러나 있었다. 기억해보니 그때 나는 슈퍼마켓에서 두부와 파를 사든 채 사진관에 갔던 것 같다. 휴일이었고 아내는 목욕탕에 간 후였다.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사진사의 얼굴이 기억났다. 그리고 결국 그 사진을 들고 동사무소에 가지 못해 넥타이를 맨 채 디지털 카메라 앞에 섰던 기억도 났다. 나는 사진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지 주머니 안에서 곽의 티슈가 만져졌다. 다시 등을 방바닥에 붙이고 누웠다. 천장의 격자무늬가 매직아이 그림처럼 현란하게 시선에 들어왔다. 한 선이 굵어지면 다른 선은 가늘어지면서 뒤로 물러났다. 나중에는 선들이 천장에서 분리되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어둠 위로 격자무늬의 선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1시였다. 목욕탕에서 몇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땀에 젖은 와이셔츠를 벗었다. 방안에는 엎어놓은 서랍과 잡동사니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겨드랑이에서 땀 냄새가 올라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벗어 놓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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