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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주에도 서역인이 살았다고?」“서산마애불의 미소는 실크로드 불교의 토착화와 완숙미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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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27  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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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도 서역 사람이 살았다

경주에서 울산 쪽으로 가다가 보면 괘릉(掛陵)이 나온다. 신라 원성 왕릉으로 추정되는 묘다. 그런데 묘로 들어가는 입구 양쪽으로 재미난 석상들이 늘어서서 묘를 지키고 있다. 맨 앞에 서역인(소그드인)으로 추정되는 무인이 우락부락한 인상으로 서 있고, 그다음에는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문인이 서있다. 그리고 익살맞게 웃고 있는 사자 두 마리가 차례대로 앉아 있다.

  오른쪽 석상의 인물은 왼쪽 사람들과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문인도 구레나룻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신라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서역인처럼 서양인을 닮은 것도 아니다. 얼굴은 동양인 같은데 귀밑에서부터 구레나룻이 덥수룩하게 나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혼혈 중앙아시아인인 위구르인처럼 보인다.

  이슬람 역사서에는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전반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해로를 따라 중국, 일본, 신라 등 극동지역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많다.

  9세기 중엽에 한 이슬람 상인이 쓴 <중국 인도 이야기>에는 당나라 말기(874-884)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반란군이 광주를 점령했을 때 12만 명이나 되는 이슬람 상인, 유대인 상인, 조로아스터(소그드) 상인 등이 살해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면은 있겠지만, 당시에 많은 외국인이 광주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9세기에 이슬람(아라비아) 상인들과 페르시아(이란) 상인들은 장강 하구인 양주(揚州)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 양주에는 신라 상인이 왕래했고, 일본 견당사(遣唐使)의 배들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경주나 일본의 도시에 진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경주 왕릉에서 출토되는 유리 제품이나 호인상을 보면 이미 사람이 왕래하고 상품이 교역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경주 황성동 석실분에서 출토된 호인용(胡人俑)이 있다. 큰 코와 깊은 눈에 소그드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호모를 착용하고 있다. 이런 호인용은 실크로드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중국(당나라)에서 정주했던 소그드인들은 그 출신 지역에 따라 강 씨(康-현재 우즈베크스탄 사마르칸트), 안 씨(安-현재 우즈베크스탄 부하라), 사 씨(史-현재 우즈베크스탄 키슈) 등의 성을 부여받고 있었다. 황소의 난 때 피난 온 호인 중 일부가 경주에 정착해 왕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고위 관직을 맡아 정무에 관여하고, 그들의 이색적인 모습 때문에 초능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돼 죽은 왕의 호위병으로 무덤 앞에 서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원나라 때 대도(북경)에 온 마르코폴로도 17년간 쿠빌라이 칸의 측근으로 봉직하면서 왕의 특사로 여러 가지 정무에 참여한 경우가 있다.

고대사회의 호화사치 명품, 유리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대표적인 상품은 유리다. 신라 왕릉급 고분에서 출토된 약 20여 점 이상의 유리 제품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 문물이 신라 경주에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분명한 증거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6세기의 유리잔이 있는데, 나는 이와 유사한 유리잔을 루브르박물관, 대영박물관,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베니스 무라노 유리박물관, 포르투갈 페나왕궁박물관 등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유리는 아름다운 광채와 화려한 색깔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유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빛이 통과하는 투명한 유리는 정말 보석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유리는 고대 사회의 최첨단 하이테크 상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족이나 귀족들이 이런 물건을 소유하거나 무덤에 부장함으로써 자기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다. 요즘 다른 사람들은 갖지 못하는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자기 신분을 과시하려고 하는 속성처럼.

실크로드 불교의 토착화와 완숙미          
       
실크로드를 통해서 들어온 것 중에서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은 불교다. 불교는 왕족이나 귀족 등 지배 계층에게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했고, 서민들에게는 기복신앙의 수단이 되었다. 불교는 처음 발생한 인도 미란타에서 서기 1-2세기에 간다라 지방(현재 파키스탄 중북부 지역)으로 전파됐고, 3-4세기에는 후한(後漢)으로, 4-5세기에는 전진(前秦)에서 고구려로, 동진(東晋)에서 백제로, 6세기에는 일본으로 전파됐다.

  불교가 500-600년 사이에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류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실크로드의 영향이 컸다. 특히 지배층의 종교에서 피지배층의 종교로까지 퍼지게 된 것은 그 의미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서민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인도에서 사막을 건너 온 불교라는 종교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경주 불국사나 석굴암, 부여 정림사 등이 권위를 내세우면서 근엄한 지배층의 불교라면, 경주 남산에 있는 감실할매불상이나 서산마애불은 소탈하면서도 소박한 서민들의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남산의 할매불상은 부처님께 불공은 드리고 싶은데 절이나 큰 불상을 세울만한 재력이 없는 어떤 사람이 그 지역의 가난한 석공을 불러다가 뒷산 바위에 불상을 새겼을 것이다. 그 할매의 앉은 자세와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영락없이 우리 할머니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부처님은 동쪽으로 와서 서민들의 마음속에 파고 든 것이다.

  서산마애불상도 마찬가지다. 서민들이 아니면 그렇게 익살스럽고 소박한 불상을 만들 수 없다. 뒷산 자연석에 새긴 이 불상에는 종교가 완전히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그런 천진함과 완숙함이 동시에 드러나 있다. 해탈한 부처의 얼굴에서 저런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어느 구석에도 권위나 허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 미소 또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허허로움에서 나오는 천진한 웃음이다.

  어느 날 내가 찍어온 마애불 사진을 살펴보다가 정말 우연히 대단한 발견을 했다. 왼쪽에 있는 동자상의 미소가 일본 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상>의 미소와 아주 닮았다는 점이다. 나는 <백제관음상>을 법륭사와 대영박물관 일본관(복제본)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건 바로 백제의 미소였다. 보일 듯 말듯 다소곳하고 은근한 미소, 그건 해탈의 미소다. 실크로드의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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