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억울함과 치욕감의 승화, 사마천의 『사기』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6.04.09  11:11:4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죽고 싶을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있는가? 죽기보다 더 치욕스런 일을 당해 본 적은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전한(前漢: BC202-AD220)의 역사가이자 문학가였던 사마천(BC145?-BC90?)은 자신의 억울함과 치욕감을 승화시켜 불후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한다.

사마천의 자(字)는 자장(子張)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韓城) 남쪽에 있는 하양(夏陽)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집필하던 『사기』의 완성을 사마천에게 부탁하였다. 사마천은 BC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문을 관찰하고, 역사 기록도 담당하였던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된다. 그는 태사령이 된 뒤 황실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고, BC104년부터 『사기』의 저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던 중 흉노(匈奴)와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포로로 잡힌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 무제(武帝: BC156-BC87)의 노여움을 사 죽을 처지에 놓인다. 죽음을 벗어날 방법은 막대한 돈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감수하는 것이었지만 사마천은 돈을 마련할 능력이 없었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로 사마천은 이를 죽는 것보다 더 심한 치욕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궁형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부탁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BC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한 사마천은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오른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요직이긴 하였으나 역사를 다룬다는 자부심에 가득 찼던 태사령에서 환관이 된 사마천은 울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울분을 승화시켜 발분저서(發憤著書) 『사기』를 완성해 낸다.

 

 

"사마천은 

자신의 울분을 승화시켜 

발분저서 『사기』를 완성해냈다. "

 

『사기』는 전설 시대인 황제(黃帝)시기부터 사마천이 생존하던 한무제(漢武帝) 시기까지 2000여 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에 대해 서술한 「세가(世家)」 30편, 시대를 대표하는 개인들을 서술한 「열전(列傳)」 70편, 연표인 「표(表)」 1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전체’란 명칭은 이 중 「본기」와 「열전」에서 ‘기’와 ‘전’을 따와 만든 것이다. 기전체는 『사기』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 서술 체제로 자리 잡을 뿐 아니라 고려(高麗)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기』 중 「열전」 70편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에 대한 기록으로, 그 분량에 있어 『사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들은 물론 장사꾼, 아첨꾼, 자객 등 기존 역사서에서 다루지 않던 다양한 인물들을 다루어 당시 사회상을 종합적으로 살피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열전」의 처음은 「백이열전(伯夷列傳)」으로 시작되는데, 사마천은 「백이열전」에서 주(周)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ㆍ숙제(叔齊) 고사를 통해 억울하게 궁형을 받은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고 있다. 「백이열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로, 그 아버지는 장남인 백이보다 셋째인 숙제를 더 사랑하여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생 숙제는 형 백이에게 왕의 지위를 양보하려 하였지만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었다며 아예 그 나라를 떠나 버린다. 숙제 역시 왕의 자리에 앉기를 거부하고 고죽국을 떠나 백이와 함께 한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부자지간, 형제지간에도 살육을 일삼던 시기에 그들은 왕의 자리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떠났던 것이다. 후에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의탁하고자 길을 떠난다. 그러나 가보니 그는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시호(諡號)를 문왕(文王)이라 추존한 서백 창의 나무 위패를 수레에 싣고 폭군인 은(殷) 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가고 있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만류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는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이를 효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 하다니 이를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며 전쟁을 반대한다. 무왕 좌우에 있던 호위 무사들이 그들의 목을 치려하였으나, 무왕을 돕던 강태공(姜太公)은 백이와 숙제가 의인(義人)이라며 그들을 구해준다. 후에 무왕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웠고,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비를 캐 먹다 굶어 죽는다.

사마천은 백이ㆍ숙제 같은 의로운 사람들뿐 아니라 공자가 제일 아꼈던 안회(顔回) 역시 굶주리다 요절(夭折)했으나, 죄 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사람의 살을 회쳐서 먹을 정도로 흉악했던 도척(盜跖)은 천수를 다 누렸다며 “천도(天道)는 공평무사해서 항상 착한 사람을 돕는다.”라는 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감정적인 문제 제기는 냉정하고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역사서와는 일정 정도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억울하게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자신의 분노를 「백이열전」을 통해 토로하고 있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사마천은 그의 억울함과 치욕감을 승화시켜 『사기』를 완성하였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 있었음을 온 천하에 보여주었다. 분노가 들끓는가? 삶이 치욕스러운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김민호(중국ㆍ교수)

한림학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인기기사
1
[보도] 학우들 마음속 ‘그림’으로 남은 대동제
2
[보도] 대동제, 이색 프로그램ㆍ부스로 열기 후끈!
3
[보도] 모두가 즐긴 축제, 쓰레기 처리 등 빈틈도
4
[보도] 개교 40주년, “이젠 자신감으로 100년의 도약을”
5
[보도] 함께 뛰며 하나되는 ‘한림 어울림 한마당’
6
[보도] 군 공백기 최소화, 이러닝 학점 취득
7
[보도] 학생·교직원·주민 한마음 산행 “개교 40주년 축하해요”
8
[보도] 다채로운 체험이 있는 박물관으로 오세요~
9
[보도] 빅데이터 시대, 데이터 분석 무상교육부터 자격취득까지
10
[시사] 곳곳에서 ‘히잡시위’, 이란 이슬람 정권 변화 생기나
신문사소개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4252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학길 1 캠퍼스라이프센터 9-308호 한림학보사
제보 및 문의 : news@hallym.ac.kr / 033-248-287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지혜수(간사)
Copyright © 2005 한림학보. All rights reserved. news@hally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