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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일모(九牛一毛), 모래야 먼지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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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10  14: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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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사성어는 ‘아홉 마리 소에서 뽑은 털 하나’라는 뜻을 가진 구우일모(九牛一毛)이다. 불후의 명작 사기(史記)를 집필한 사마천(司馬遷)의 일화를 통해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삶을 견딜 가치가 있음을, 그리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희망을 찾길 바란다.

구우일모(九牛一毛). 해석하면 ‘아홉 마리 소에서 뽑은 털 하나’라는 뜻이고, 이 비유는 흔히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적은 것’을 뜻한다고 풀이된다.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서 한 말일까?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뜻 생각하면 ‘희소가치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전혀 반대의 의미이다. 소가 한 마리도 아니고 아홉 마리나 되는데 그 중 어떤 소에게서 뽑힌 털 한 가닥을 상상해 보자. 흙바닥에 떨어진 털이라면 육안으로 구분하기도 힘들 것이고, 그 털을 주워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훅 분다면 날아가는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빠진 털은 아무 쓸모가 없다.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가?

충격적이게도 ‘인간의 존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인간의 존재, 인간의 목숨이 아홉 마리 소 가운데 어떤 놈이 흘린 털 한 가닥만큼이나 하찮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이것은 사기(史記)의 저자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이 인생에서 가장 처절한 고난을 겪고 있던 시기에 했던 말이다. 어떤 사연이 있었던가.

기원전 99년 5월 한(漢) 무제(武帝)는 이광리(李廣利)를 대장군으로 삼고 기병 3만을 줘 흉노를 치게 했다. 그리고 장군 이릉(李陵)에게는 보병 5천을 주어 흉노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이광리를 돕게 하였다. 이광리는 한 무제의 애첩인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인데, 딱히 전쟁을 잘하진 못했으나 누이동생 덕에 황제의 총애를 입어 그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반면 이릉은 한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주천(酒泉)을 나와 흉노를 공격하던 이광리는 결국 2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이에 이릉은 5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여러 차례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이릉이라도 8만이나 되는 흉노를 대적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무기와 화살도 떨어지고 구원병도 오지 않아 이릉의 군대는 흉노군에게 완전히 포위됐고, 그는 남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고 말았다. 흉노족의 추장 선우(單于)는 그를 우교왕(右校王)으로 삼았고, 그는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이듬해, 무제는 전쟁으로 죽은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족에 투항해 그들에게 용병술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해 이릉의 일족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당시 한 무제는 솟구치는 배반감으로 분노가 극에 달했고, 조정의 중신과 이릉의 동료들은 그 엄명에 눈치만 살필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이릉을 변론하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태사령(太史令-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있던 사마천이 적극적으로 이릉을 옹호하고 나섰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 친척도 아니었고 동향(同鄕) 사람도 아니었으며, 그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적도 없었다. 다만 이릉이 흉노족도 경외하는 이광의 손자이며, 그가 국난에 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지킬 장수라는 것을 굳게 믿었을 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온갖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이구동성으로 그를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하기도 했다.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적은 수의 보병으로 수많은 오랑캐와 싸워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서조차 배신자들이 있어 패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흉노족에 투항한 것은 필시 훗날 황은에 보답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고육책일 것이니, 차제에 폐하께서는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알리심이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그러나 이릉에 대한 사마천의 변호는 도리어 대장군 이광리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꼴이 돼 황제의 역린(逆鱗)을 건드리고 말았다. 무제는 더욱 노하여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궁형(宮刑)’에 처할 것을 명했다. 궁형은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 이른바 ‘거세’이다. 역대 황제들이 지식인을 가차 없이 처단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하지만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거세’를 명한 사람은 한 무제가 유일하다. 이는 일생 동안 수치와 모욕을 견디며 살 것이냐,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냐를 갈등하게 할 만큼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다. 사마천은 수없이 자살을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으로 잠깐의 기개를 떨치는 것보다는 살아남아 치욕을 견디는 쪽을 택했다.

사마천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 없는 이유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법에 따라 처형을 당한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 빠지는 것[九牛一毛]’과 같을 뿐이니 ‘나’라는 존재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한, 세상 사람들도 내가 선비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나쁜 말을 하다가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비웃을 것 아닌가?”
거세까지 당했는데도 차마 죽을 수 없었던 것은, 그에게 책을 완성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史官)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史記)의 완성을 부탁했고, 그 유지를 받들어 사마천은 기원전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기원 전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해 환관(宦官)으로는 최고의 자리인 중서령(中書令)에 올랐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다. 그는 환관의 신분으로 사대부들의 멸시와 자유롭지 못한 운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했다.

사마천의 선택은 옳았는가. 이릉은 끝내 한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흉노 선우의 군사·정치의 고문으로 활약하다 몽골고원에서 병사했다. 사마천의 예측이 빗나간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황제 앞에서 발언한 것이 거세를 당할 만큼 잘못된 일이었나. 분명 한 무제의 처벌은 도가 지나친 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만일 사마천이 장렬한 죽음을 선택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이는 황제가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에 동의하고 굴복하는 것이며, 자신의 재능과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도도한 역사의 강물에서 보자면 한 무제 유철(劉徹)은 기껏해야 수많은 황제 중에 그저 그런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아무리 사력을 다한다고 해도 사기 같은 대작을 쓸 수는 없다. 사마천에게는 사기가 불후의 명작으로 남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명산(名山)에 감추었다가 그것을 전해줄 적당한 사람을 만나 온 고을과 도읍에 널리 퍼뜨릴 수만 있다면 지난날의 치욕과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으리니, 일만 번 죽임을 당한다 한들 무슨 후회가 남겠는가.” 이런 확신이 그로 하여금 치욕을 견디게 만들었다. 또한 삶이란 아무리 기구하고 비루해도 어쨌든 버텨나갈 만한 가치가 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사람에 대한 시비는 죽은 후에야 가려지는 법.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를 증명할 기회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사람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우리는 어떻게 삶을 견뎌내야 할까, 살아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행복, 희망, 기대? 때로는 분노가, 누군가에 대한 의무가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견디게 한다.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 정말 얼마큼 작으냐......’ 모래와 바람, 먼지와 풀에 비견될 만큼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강지희 (교양기초교육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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