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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교수의 '식탁위의 인문학] 이중섭 작품에서 소와 함께 주요 소재였던 닭 행복했던 원산 시절 떠올리는 가족 사랑의 매개너무 자세히 관찰한 나머지 닭의 이가 옮아 병 걸리기도 ‘투계,’ 공산당도 좋아했지만 비협조적인 태도에 후엔 냉대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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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6  10: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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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닭을 사랑한 화가 샤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봤다. 닭과 관련된 화가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샤갈이 있다면 한국에는 20세기의 천재 화가이자 비운의 주인공인 이중섭이 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지주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이었던 이중섭은 서울 종로에서 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더욱 내성적이 됐고 그림에 한층 매진하게 된다. 이후, 진학하고자 했던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낙방하고 민족학교였던 오산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뀐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미국 예일대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파리에서 활동한 바 있는 임용련이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이중섭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에게 많은 습작 연습을 시켰다. 임용련의 격려 속에 이중섭은 학교 졸업 후,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1935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재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제국미술대학에서의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당시, 유럽의 첨단 미술 사조를 빠르게 수용하던 분카가쿠엔(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기며 서서히 자신만의 야수파적 조형성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더불어, 분카가쿠엔에서 훗날 그의 부인이 된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패전 직전의 일본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고 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중섭은 마사코를 일본에 둔 채, 원산으로 귀국하게 된다. 다행히 이듬해에 전쟁은 끝나고 한국이 해방됨과 동시에 마사코는 원산으로 건너와 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렇게 어렵사리 자신의 연인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다음 해에 태어난 첫째 아이는 디프테리아로 사망하고 만다. 당시, 큰 충격을 받았던 그는 죽은 아이를 모티브로 한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1947년에 열린 <해방기념전람회>에 출품한다.

한편, 시대 상황은 이중섭으로 하여금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1950년에 6.25 동란이 발발하자 그는 부인과 부산으로 피난을 떠간다. 그 와중에 다시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부산에서의 생활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이중섭은 가족들을 데리고 재차 제주도로 피난가게 된다. 그리고 1952년, 마사코의 건강이 나빠져서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전쟁의 와중에서 그림만 그렸던 까닭에 가족 부양 능력이 제로에 가까웠던 그는 극심한 생활고로 병을 얻은 아내를 자식들과 함께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선원증을 빌려 우여곡절 끝에 일본 도쿄를 방문한 그는 단 일주일간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재회이자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가족들을 도쿄에 남겨둔 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통영, 진주, 서울, 대구 등을 전전하며 어렵사리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한국 화단은 이중섭으로 하여금 술독에 빠지게 했고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채, 40세가 되던 해에 간장염으로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타계하고 만다.

   
 

한국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중섭을 대표하는 그림 소재는 소이다. 하지만, 비단 소만 그의 화폭에 자주 올랐던 것은 아니다. 아이와 게, 닭 또한 그의 그림 소재로 자주 동원됐기 때문이다. 닭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그는 “신혼집 마당에서 마사코가 키운 ‘닭’은 ‘소’ 그림에 이어 내가 그릴 수 있는 익숙한 ‘내’가 되었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이중섭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 소재의 경우,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곤 했는데, 소와 더불어 닭 또한 자신의 분신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에 이중섭의 습작과 그림에서는 닭이 아이, 게 등과 어우러져 ‘닭,’ ‘닭과 아이,’ ‘닭과 게’ 등과 같은 완성품으로 세상에 자주 소개됐다.
이중섭이 닭을 본격적으로 그리던 당시는 원산에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던 시대로, 그가 살던 곳에는 넓은 마당이 있어 닭을 길렀다고 한다. 이중섭은 닭을 너무 자세히 관찰한 나머지 닭의 이가 몸에 옮아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쨌거나 닭 관찰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모이 주는 시간을 종종 잊어 부인이 모이를 주기도 했다고 한다.

한 가지 더 첨언하자면, 해방 이후의 북한 당국은 이중섭의 닭 그림 가운데에서 닭싸움 그림인 ‘투계’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투계’가 보여주는 투쟁성을 높이 산 까닭에서다. 하지만, 내성적인 동시에 비정치적이었던 그의 공산당에 대한 비협조는 나중에 그가 공산당으로부터 핍박받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한때는 공산당에게서도 사랑받았던 닭 그림이 종국에는 “털이 빠진 닭 같지도 않은 닭”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한국과 북한 모두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가 이중섭이었던 셈이다.

그럼, 공산당이 폄하했던 이중섭의 닭 그림 두 편을 이번 호에 게재해 보겠다. 원래는 강렬한 느낌의 ‘투계’ 하나만을 실어 독자 여러분들이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자 했으나, 이중섭의 정신적인 고통이 절정에 다다랐던 무렵의 작품인 ‘투계’는 상당히 어둡게 그려져 있어 흑백 사진만이 제공되는 신문 지면에서 눈에 잘 띄지 않을 것 같아 밝은 그림의 ‘달과 게’라는 작품도 함께 게재하기로 했다.

다음 시간에는 이중섭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그밖에도 닭을 사랑한 화가들에 대한 소개를 이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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