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13일 부산의 어느 고등학생이 교실에서 식칼로 급우의 등을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범죄를 저지른 학생이 영화 ‘친구’를 40차례 이상이나 보고 영화를 모방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도 또 다른 문제를 던지고 있다.
영화나 텔레비전의 폭력묘사가 모방심리를 부추겨 사회적 범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주장은 어제 오늘 나온 말은 아니다. 이른바
미디어의 폭력배양효과에 대해서는 미국의 경우 수십년간 막대한 자금을 들여 연구를 수행해 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떠한 연구에서도 미디어의
폭력묘사가 현실범죄를 증가시킨다는 직접적이고 단정적인 결론이 제시된 바 없다. 다만 미디어 폭력이 시청자에게, 특히 청소년에게 모방효과를
일으키지 않겠느냐는 점은 여러 가지 정황적 자료를 근거로 삼아 때로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심증으로 제시될 뿐이다.
엄청난 관객 동원으로 한국 영화의 부흥을 알리는 메신저처럼 추켜세워졌던 영화 ‘친구’가 하루아침에 엽기적 살인의 원인제공자로
지목된 상황을 두고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다. 폭력영화, 혹은 미디어의 폭력묘사를 나무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폭력묘사가 자제, 혹은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절병처럼 반복되는 손쉬운 희생양 의식이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디어의 폭력묘사는 현실의 반영일 뿐이며, 더구나
범죄의 직접원인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맞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두가지 주장 모두 허수아비를 향한 규탄일 뿐이며, 실상은 두 의견 모두에게서 진실과 오류의 일단이 각각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영화나 텔레비전 속의 폭력이 현실 폭력의 원인제공자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만연된 폭력으로 말미암아 붕괴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이소룡 영화가 일종의 신드롬을 일으켰었는데, 당시 어느 학급에나 가방에 쌍절곤을 넣고 다니는 아이들이 몇
명은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이것을 꺼내어 휘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의 박을 터뜨리는 무기로 둔갑하기도 하였다.
이소룡 영화가 없었더라면 쌍절곤도 몰랐을 것이고 따라서 그것으로 박을 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빗자루나 야구방망이 등을
사용했을지는 모르겠다. 사람을 패고 죽이고 하는 것이 반드시 어디서 봐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든 보고 배운 방법으로
하기가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쉬울 것이고, 특히 그런 행동이 멋지게 보였다면 더욱 따라할 개연성이 크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책이나 신문이나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름다운 동화만 들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폭력적 환경으로 치자면 매일 저녁 뉴스도 예외가 아니며 (아프간을 보라!), 무시로 자행되는 정치폭력 (정치인들의 거짓말,
권력남용, 부패 등)도 사실은 무시무시한 실제 폭력이다. 영화 속의 총, 칼만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리한 강변일 뿐이며 더 큰
폭력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는 술수일 뿐이다. 하지만 깡패영화가 영웅담처럼 소비되는 문화적 천박성에 대해서는 따로 짚고 넘어가야 옳다.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도서관에서 늦도록 공부하다가 밤길에 집에 간다. 그런데 갑자기 동네 깡패가 나타나서 때리고
겁탈하고 돈을 빼앗는 장면을 말이다. 현실 속 골목길의 깡패는 장동건도 아니고 유오성도 아니다. 일상의 사사로운 안녕을 파괴하고 우리의 조그만
삶을 무너뜨리는 ‘공공의 적’일 뿐이다. 이른바 나와바리 관리(조폭들의 자기구역관리)를 통해 일하는 자의 등을 치고 선량한 사람들을 협박하는
기생적 존재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헐리우드 폭력물이 우리 영화에 안 좋은 영향을 줬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나는 어떤 헐리우드의 삼류 폭력
영화에서도 깡패가 영웅처럼 묘사되는 것을 떠올릴 수 없다. 대개는 깡패로 살았거나 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정의를 위해 힘을 쓰는 인물을
앞세우든지, 아니면 깡패와 맞서는 의로운 경찰을 앞세우든지 하는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천박한 폭력의 묘사인 경우에
있어서도 힘의 사용에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우리 깡패영화에는 이런 문법이 발견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몰가치와
부도덕이 무조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영화적 내러티브에는 가치와 이상에 대한 비전과 도전이
담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무수한 폭력물을 ‘즐기며’ 살아 갈 테지만, 이왕이면 삼류 깡패들 패싸움의 수준을 넘는 폭력의 미학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관객의 수준만이 결국은 영화적 고양을 유인해 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 김신동(언정·방송·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