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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던 휴머니스트 올 하반기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를 꼽으라면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일
것이다. 흥행면에선 그리 큰 재미를 못 보고 있는 것 같지만, 뚜껑이 열리기 전부터 모아졌던 큰 기대와 개봉 후 이어지는 작품에 대한 해석 및
논란은 다른 어느 영화보다도 풍부한 것이었다. 영화가 이토록 화제가 됐던 것은 거대 제작비의 투입도 스타캐스팅도 아닌 배창호라는 거장이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한동안 영화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대중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젊은 남자’ 이후
‘러브스토리’와 ‘정’이란 작품을 통해 그의 영화열정은 계속 됐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이전의 전형적인 주류 충무로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에서
제작됐다. 충분한 자본과 배급이 뒷받침된 상황도 아니었고, 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안성기란 명배우의 출연도 없었던, 감독 스스로 만들고싶은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약간의 인디 영화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만들어진 영화였다. 덕분에 감독 스스로의 메시지와 표현양식은 다른
그의 영화들보다도 훨씬 솔직하고 훌륭하게 묻어날 수 있었지만, 대중과는 단절된 시간을 보내야만했다.
흔히 배창호처럼 이름 하나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느껴지는 기성감독들은 이제껏 획득해놓은 성공이라는 기반의 편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하지만 배창호는 그러한 길을 거부하며, 성공한 감독이었지만 다시금 스스로 원하고 인정할 수 있는 감독으로
거듭나기를 원해 든든한 배경과 조건에서 안주하고 정체할 수 있는 감독이 아닌 스스로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감독이 되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내놓은 ‘흑수선’은 이전보다 더 큰 기대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정’이란 작품으로 더욱 일치월장해진 그의 연출력과 스타시스템과 마케팅.
거대 제작비의 블록버스터를 그가 만든다는 것은 분명 색다르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개봉 후 ‘흑수선’에 대한 평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스테리 구조가 취약하고, 나레이션에 의존하는 상황
표현 등 여러 가지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부분은 역시나 배창호 영화였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초점이
되는 부분은 반세기 동안의 비극 속에서 피어나는 두 남녀의 사랑이었다.
배창호는 이제껏 늘 사람에 관한,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던 휴머니스트였다. 1982년 데뷔작이었던 ‘꼬방 동네 사람들’은
소외 받은 하층민 달동네 사람들의 삶을 진지하고 따뜻하게 그린 영화였고, 고래사냥에서는 거렁뱅이 청년과 소심한 대학생, 벙어리 윤락여성을 내세워
인간미 넘치고 위트 있는 로드무미를 선보였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에서는 뇌성마비 청년을 통해 진정 중요하고 위대한 것은 순수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소심한 한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특유의 감수성으로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였다. 이 밖에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는 6.25로 인한 자매의 비극적 사랑과 삶에 대해 그리고 있고, ‘깊고 푸른 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젊은이의 야망과 사랑을 그린 영화였다. 실패작으로 평가받는 ‘천국의 계단’에서의 여주인공은 일류 여배우로 성장하지만
성공을 뒤로한 채 원래의 순수한 삶으로 되돌아간다.
이렇듯 그의 영화들은 늘 인간을 중심에 둔 영화였고, 멜로물이 많았다. 억지로 감정을 이입하게 만드는 영화들도 아니었고,
현학적인 영화들도 아니었다. ‘흑수선’이란 영화는 이전의 그와 영화와는 다르게 어렵고 방대한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완성도에
있어서의 결함을 범한 영화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전의 그의 영화처럼 인간냄새 나는 충분한 감동과 작품성이 있는 영화라는 것이고 그의 연출력이
그간의 공백기간동안 결코 녹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영화가 세간의 기대치를 충분히 충족시키진 못했지만, 앞으로 그가 만들어갈 영화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는 더욱 높아지게 될 것 같다. 분명 그는 성공한 중견감독이지만, 결코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감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 김정준(영상틀 16기, 물리화학부·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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