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67년에 개봉된 앙리 베르누일 감독의 영화 ‘25시’의 포스터‘ 버질 게오르규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멕시코 출신의 미국 배우로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지닌 앤서니 퀸이 금발에 푸른 눈의 아리안족 전형으로 등장해 큰 눈길을 끌었다. (이미지 출처: 구글)

지난 시간에는 금박과 미다스의 신화, 그리고 금발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보았다. 이번엔 금발에 얽힌 후속편이자 ‘색깔의 인문학’의 마지막 편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금발을 뜻하는 ‘블론드’의 어원은 프랑스어이다. ‘노랗다’는 고대 라틴어 ‘blundus’라는 단어가 중세 라틴어 ‘flavus’에서 조악하게 전승돼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동차를 후진할 때,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는 ‘올 라이트(all right)’가 일본인들의 조악한 발음을 거쳐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서 ‘오라이’로 통용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후, 블론드는 다시 의미 변천을 통해 여성의 머리색을 일컫는 대명사가 됐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블론드는 스칸디나비아와 발트해 국가들에서 맨 처음 진화했으며, 오늘날 블론드가 가장 많은 곳 역시, 이 지역이다. 북부 유럽에 블론드의 등장한 이유는 밝은 색 피부와 함께 옅은 색 털이 약한 햇빛 속에서 비타민D를 합성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란다.

재미있는 사실은, 로마 제국과 신성로마 제국에 이어, 제3 제국의 기치를 내세웠던 나치 독일이 지리적으로 이곳에서 다소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발을 아리안족의 이상적인 머리색으로 간주했다는 것. 참고로 아리안족이란 백색 계통의 인도유럽 종족으로 기원전 1,500년 무렵 인도, 이란, 유럽 등으로 이주한 유럽인의 조상이다. 그러고 보면, 버질 게오르규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25시’에서는 아리안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리안족처럼 대접받다 결국에는 전범으로까지 몰린 한 평범한 루마니아인의 극적인 인생을 비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난한 루마니아 농부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으로 거짓 보고돼 강제 노동소에 보내진 주인공은 곧 이곳에서 탈출했지만 스파이 혐의 속에 다시 독일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고 금발에 파란 눈을 지녔다는 이유로 독일 친위대에 의해 순수 아리안족의 전형이라는 선전물로 인생이 바뀌어 버린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미군에 의해 전쟁 범죄자로 지목돼 법정에 서게 되고 아내가 8년 동안 그에게 보낸 편지 덕에 어렵사리 풀려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니 블론드가 항상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1812년, ‘백설공주’가 세상에 처음 나왔을 당시, 독일의 그림 형제는 여주인공들에게 까만 머리색을 부여했다. 하지만, 컬러 인쇄술이 점차 발달하면서 흑백영화에서도 블론드가 상대적으로 도드라져 보이자 블론드는 상업적으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한다. 특히, 마릴린 먼로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50년대 이후부터 블론드는 성적인 매력과도 연관되었으며, 몇몇 설문 조사 결과에서는 블론드를 지닌 여종업원들이 팁이 가장 많은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듯 블론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월트 디즈니의 만화 주인공들 역시, 검은색과 갈색을 제치고 금발이 다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신데렐라, 라푼젤, 앨리스(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오로라(잠자는 숲속의 공주), 엘사(겨울왕국) 등이 금발의 여주인공들이다.

참,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미국의 팝콘 생산업체들은 관람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많이 먹는 영화의 감독에게 ‘황금옥수수상’을 수여한다. 그렇다면 엘사가 열연하며 지구촌을 엘사 열풍으로 몰아 넣었던 ‘겨울왕국’은 과연 황금옥수수상을 받았을까? 답이 궁금한 독자들은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지난 2019년 가을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4년이 지났다. 3년간의 코로나 기간도 고스란히 포함돼 있었고. 그동안 하얀색을 시작으로 검은색과 노란색을 거쳐, 파란색과 빨간색, 초록색과 주황색, 보라색과 갈색, 그리고 은색을 거쳐 금색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색은 대체로 다룬 느낌이다. 비록 이야기와 설에 불과하긴 했지만 여러분들의 상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다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을 터. 마찬가지로 자료들을 찾고 인터넷을 뒤지는 과정에서 필자가 경험한 즐거움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그럼, 수업 보강 기간을 슬기롭게 보내기 바라며 기말고사도 잘 치르도록 하자. 더불어 가을 학기에는 ‘숫자’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오디세이를 떠나 보도록 하겠다. 이름하여 ‘숫자 인문학’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제목에 미리 겁 먹을 필요는 전혀 없다. 수학이 아닌 숫자에 관한 이야기인 까닭에서다. 부디 여름방학 알차게 잘 보내기 바라며 석 달 뒤에 반갑게 재회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