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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감정속에서도 미국의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 끝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은 스포츠가 갖는 ‘각본 없는
드라마’의 특징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먼저 이번 동계올림픽은 민족적 우월성과 국민적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스포츠가 갖고 있는
정치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는 9ㆍ11 테러로 찢겨진 성조기를 개최국의 공식 국기로 들고 나온 것과, 구소련에게 이겨 미국에게 금메달을 안겨
주었던 아이스하키팀을 최종 성화주자로 배정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과 정황은 새로운 주권형태로서 등장한 ‘제국(Empire)’의 실체인 미국의 보이지 않던 본 모습(폭력적
군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9ㆍ11 테러로 자존심이 크게 꺾인 미국으로서는 세계최강이라는 지위를 새롭게 드러낼 계기가 필요했다.
마침 동계올림픽은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의 모습을 화려하게 내보일 수 있는 제관식으로서 충분했다. ‘짐이 곧 국갗라는
말과 같이, 미국인의 긍지를 높여주고 자국선수의 승리가 보장될 수 있는 대회운영은 모든 경기규칙에 앞섰다.
하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각본 없는 드라마’로서 짜릿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든 것은 오심에 의한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박탈사건이 야기한 효과이다. 해방 공간 이후 반미감정이 지금처럼 대중적 동의를 통해 공개적으로 표출된 때가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이번 사건을
통해 야기된 반미감정은 여느 반미운동단체의 활동보다 훨씬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맥도널드, 스타벅스, 코카콜라는 미국을 상징하는 상품으로
낙인찍혀 불매운동의 목표가 되었고, 성조기가 세종로 한복판에서 불태워졌으며 인터넷은 반미운동의 담론을 마구 쏟아내는 마이크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이러한 반미감정의 고조와 운동이 미국의 국제적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만큼 강력한 것은 아니다. 스포츠를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키는 하나의 이벤트로 규정할 경우, 최근 고조된 반미감정은 한낱 일시적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판단은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무비판적 소비행위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미국의 대중문화는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자신의 사정권 안에 포섭시켰다. 미국의 영화산업은 헐리우드 문법을 통해 유럽의 영화시장을 석권했으며, 팝송은 구소련 젊은이들의 막힌
가슴을 열어 주었고, 코카콜라는 중국인의 까다로운 입맛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한국의 수용은 무비판적이다 못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미국의 6ㆍ25 참전은 미국을 ‘혈맹국’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과거 개발독재체제의 근대화 정책은 미국을 국가발전의 모델로서 설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정황은 결국 미국의 대중문화를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바라보는 에피스테메(무의식적 인식체계)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가령, 50년대 대중가요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럭키서울’
등과 같이 영어를 노래제목으로 썼으며, 미8군 출신의 가수(신중현, 김추자)를 최고의 뮤지션으로 평가했다. 또한 70년대 통기타 문화(송창식,
양희은, 한대수)는 미국의 저항가수인 밥딜런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미국 대중문화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성장한 궤적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소비행위는 철저하게 미국의 문화산업논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미국의 문화산업논리가 가지고 있는 대중 흡입력은 호르크하이머(1895∼1973, 독일 철학자·사회학자)와
아도르노(1903∼1969, 독일의 철학자·미학자·사회학자)의 우려보다 훨씬 막강하다. 현란한 이미지 과잉에 기초한 CF는 대중의 과시적
소비욕구를 창출했는가 하면, 마이클 잭슨의 현란한 춤이 방영된 MTV는 가수를 만능 엔터테이너로 만들었다. 한국사회에서 고질적인 경제문제인
과소비에 CF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은 5조 8천억 원(2000년 기준)에 이른 광고시장의 규모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가수가 가창력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측면(댄스가수, 미남ㆍ미녀가수 강세) 혹은 개그맨을 능가하는 ‘개인기(컨추리 꼬꼬)’를 두루 갖춰야 한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는 바이다. 또한 관객 점유율 45%(2001년 기준)를 넘긴 한국영화산업이 급속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헐리우드 영화제작방식인
대자본 유치 및 유통시장의 현대화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오노를 욕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민족주의적 관점에 기반한 최근의 반미감정은
이러한 현상을 단지 ‘의식 없는 놈’이라고 속단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스타벅스라는 아이콘은 미국의 자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대중의 수용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생산한다. 가령 청바지는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한국사회에서 청바지 소비는 미국과 다른 의미와 맥락을
가진다. 즉, 한국에서 청바지는 편한 옷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패션의 측면이 훨씬 강하다. 이는 대중문화소비에 있어 기원(origin)의
문제(생산지)가 부차적임을 의미한다. 대중문화는 이미지와 음향 그리고 스펙터클을 통해 일상생활을 구조화하고 정치적 관점과 사회적 행동을
구성하면서 자신에 대한 고정된 의미규정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스타벅스라는 문화적 아이콘과 오노 비판이라는 언설이 정세와 맥락에 따라 배치되고
조합되는 다양한 경우의 수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오노를 욕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혹은 저항적으로 규정할 수 있게 만든다. 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사위를 던져보자!
/ 김성일(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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