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1테러 이후 미국 국민은 ‘집단 노이로제’ 징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안보’가 미국사회의 최고가치로 등장하고 있으며, 부시는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다. 미국 의회는 테러범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연방수사국에 임의로 개인 전자 우편과 전화 내용을 엿보고 엿들을 권한을 부여했다. 공항과 공공건물 곳곳에서 경찰관과 무장 군인이 검색을 강화하고 있고, 연방수사국과 별도로 국가안보국이 신설되었다. 외국인 입국 심사도 강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입국하는 방문자의 고통이 심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유색인종이 그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태도는 그 역사가 깊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4∼1945년 사이, 미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유럽의 헤게모니를 이어받아 전세계의 지배권을 사실상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양측은 모두 ‘중립은 부도덕하다’라는 기본 전제 위에 서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시기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공모관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얼마 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란ㆍ이라크ㆍ북한을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악의 축’이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그러나 이 발언의 저의야 어떠하든 ‘악의 축’이라는 발언 자체는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겨냥하는 대상은 다르나, 레이건 대통령은 구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많은 돈을 군사용으로 지출했다.

  이것은 현재 미국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구소련의 자리에 이슬람권이 대체되었을 따름이다. 세계질서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려고 한 닉슨, 포드, 카터를 대신해 미국 국민이 레이건을 선택한 것은 그가 내세운 ‘강력한 미국의 재건’ 때문이었다. 이 점 또한 지금도 하등 변화가 없다. 더욱이 이제는 탈냉전의 시대, 미국이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면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이런 거창한 문제를 좁히면 우리는 곧장 분단문제와 마주친다. 물론 ‘통일이 지고의 가치일 수 있는갗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민족’이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민족’이 그리고 그것의 왜곡된 형태인 ‘민족주의’가 크게 조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세계체제론자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우리의 문제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의 힘은 특히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서 섣부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와는 무관하다. 다만 최근 미국의 국내상황을 조금만 신경 써서 바라본다면 하나의 시각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동기와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정치논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까지 스며들 때 결국 그 피해자는 일반국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 피해자는 미국 국민만도 아니며, 미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소수인종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상황이 이러하다고 할 때,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자세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적어도 자국만의 이익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적 사고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싶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냉철한 시각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그 자그마한 단서의 하나로, 나는 우리 문학사에서 대표적인 반미소설로 꼽히는 [분지](남정현)의 현재적 의미와 그 한계까지를 곰곰이 되씹어보기를 권한다.

/ 이상갑(교양교육부·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