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차별을 사회적인 차별로 인식하고,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여성운동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이에 문화부에서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향후 전망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여성운동의 태동과 자유주의 여권운동
2. 진보적 여성운동과 현재 그리고 전망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즉 여성문제는 시대와 사회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지만, 여성운동이 시작된 것은 서구의 경우 18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말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성운동이란 개인적인 자각이나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해방의 이념, 목표, 주도세력, 운동방식 등을 명확히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방면의 성차별을 없애기 위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산업화와 근대사회의 형성에 따라 고립 , 분산된 가정의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여성문제를 여성 전체의 문제, 즉 사회적인 차별로 인식할 수 있게 됐다. 여성운동을 여성해방 이념의 일반적인 분류인 자유주의, 맑스주의, 급진주의, 사회주의(최근에는 포스트 모던 여성해방론을 새로운 부류로 보기도 한다) 페미니즘에 의거해서 구분해 보면, 우리 사회의 여성운동은 기존 체제 안에서 부르조아 여성들의 권익신장을 목표로 한 자유주의 여권운동과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맑스주의 여성운동이 크게 두 축을 이루며 역사적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자유주의 여권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자유주의 여권운동은 조선후기 봉건사회의 해체, 개항과 외세유입 등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세기 말에, 개화파와 독립협회의 여자교육론, 기독교 선교사들의 여학교 설립 등에 자극받은 개화파계의 여성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 운동에 참가한 여성들은 대부분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족한 양반층이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 여성들로서, 여성 교육권과 직업권의 확보, 봉건구습 타파 등 여성의 기본 인권을 확보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들은 학교설립, 토론회, 연설회 등을 통해 여성 계몽을 위한 일상적 활동을 벌여나갔고, 이외에 국채보상운동, 군자금 모집 운동, 3·1운동에서의 만세시위운동 등 민족적인 과제도 결합시켜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던 1930년대 이후, 사회의 지도급 지식인 인사들이었던 운동의 주도세력은 시국강연, 가두선전, 글, 방송, 위문공연 등 온갖 방법으로 일제침략 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와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였으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와 딸, 동생의 입장에서 징병, 징용, 학생동원에 적극적으로 결합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결과로 여성해방이념으로써의 자유주의 여권론이 갖고 있는 한계는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 여권론이 지향하는 목표는 기성 사회체제 안에서의 ‘여성권익 신장'이며, 이때의 권익신장이란 전체 여성이 아니라 일부 여성, 즉 이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부르조아 여성에게만 해당됐다. 그래서 이들은 여성의 직업권 확보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계급적, 성적인 차별로 고통받고 있는 대다수의 민중 여성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제에 굴복하면서도 여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이전까지 내걸었던 민족문제라는 것도 일제의 압박이 가해지자 곧 타협하여 자신들만의 계급적 이익을 유지하기에 급급함으로써 결국 친일적 성향을 띄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볼 때, 여성문제가 근본적인 사회변혁 없이 부분적인 제도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인 여권운동마저도 식민지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와 현실적인 조건이 다른 서구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안이한 발상이 낳을 수 있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 이념이 표방하는 여권신장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이 없었고, 따라서 대중적인 기반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자유주의 여권운동은 권력과 결탁하여 개인의 출세를 지향하는 세력으로 전락하게 됐고, 이후의 자유주의 여권운동의 방향을 규정지었다.

  해방 이후 자유주의 여권운동 세력은 미군정과 우익 정치계의 비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대표적인 우익단체인 「독립촉성 애국 부인회」의 활동과 운동노선은 현모양처를 강조,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참정권 획득, 여성문맹퇴치, 여성의 능력개발 및 교육확대, 공·사창제 폐지 등을 주요과제로 삼았다. 일제잔재 청산, 토지소유관계나 노동법령에서의 여성에 대한 실제적인 보호와 배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좌우익이 연대하여 공·사창제 폐지운동을 벌여 불완전하지만 미군정 시기에 부녀자의 인신매매 및 매매계약을 금지하는 법령과 공창제 폐지법령이 공포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남한정부 수립 후 대다수 여성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조직화했던 맑스주의 여성운동이 좌절됨으로써, 남한에는 우익의 자유주의 여권운동만이 관의 비호하에 세를 확장해 나갔다. 1948년 2월에 「독립촉성애국부인회」와 서울시 부인회가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를 결성했는데, 이 단체의 활동내용을 보면 국민생활 개선, 문맹퇴치, 예의범절 교육 등 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여성에 대한 반공교육과 선전 및 전후 구호, 선도 사업 수준에 머물렀다.

  유신독재 체제 하에서는 새마을 부녀회가 행정말단에까지 조직되었고, 기존 여성단체였던 한국부인회(「대한부인회」가 1964년에 개명),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전국주부교실중앙회」 등도 소비절약, 식생활 개선 등 정부시책을 홍보했다. 단체의 활동은 도시 중상류층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유지됐고, 당시 독재권력의 횡포하에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 등 여성의 절박한 요구나 사회민주화 실천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이러한 여성단체들은 조직적으로는 비대했으나 여성의 실제적인 지위향상보다는 관변단체로서 정부정책을 선전하고 여성을 동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자유주의 여권운동에서 나름대로 이념에 충실했던, 그리하여 그 명맥을 유지시켜준 운동이 바로 가족법 개정운동이었다. 1953년 신민법 제정을 전후하여 남녀평등한 가족법 제정과 개정을 위한 노력이 계속됐는데, 1973년에는 가정법률 상담소, 「YMCA」, 「한국유권자연맹」,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이 모여 「범여성 가족법개정촉진회」가 결성됨으로써 본격화됐다. 우여곡절 끝에 1977년 1차 가족법 개정을 성사시켜 재산상속상의 남녀차별이 다소 약화됐다.

  이와 같은 역사적 전개과정의 결과로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운동은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유한 부인들의 여가선용 활동으로 또는 정계진출의 교두보로 인식되어, 여성들에게조차도 외면당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여성권익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성차별적인 법과 제도, 관행의 개선을 게을리함으로써, 자유주의 여권운동은 조직은 있지만 과연 독자적인 여성운동 세력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하는 운동의 정당성까지도 의심받고 있다. 식민지 지배체제, 군사독재, 강고한 가부장적인 문화, 사회구조 하에서 체제내 개선을 지향하는 온건한 자유주의 여권운동도 존립하기 힘들었다고 변명하기에는, 주도세력이 갖고 있는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의지가 너무나 불철저하고 안이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우리 사회에서 맑스주의 여성운동은 자유주의 여권운동이 수행해야 할 몫까지 담당하면서,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여성운동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 박기남(연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