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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진단]96년 상반기 한국영화 총평새로운 형상과 언어 등 독특한 시도 돋보여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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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2.09.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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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는 언제나 자신의 생산성을 멈추지 않는다. 직배와 비디오 산업의 공략으로도 늘 어딘가에서 자신의 갱신의 기회를 찾으며 그 가운데서 실패와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96년의 상반기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 겉과 안의 양상은 다를 수도 있어서 부끄러운 대종상의 추문들도 들려오고, 작년에 이어 비디오 시리즈 『젖소 부인 바람났네』의 신드롬이 우리 모두에게 이상한 제목 만들기의 유행을 부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것은 때로는 기대에 못 미치게 때로는 놀라운 수위로 상승하면서 한국영화관의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가장 자신있게 만드는 것은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그리고 보려고 하는 한국 영화의 관객이 여전히 존재하며 아직 그 전문성에서는 완성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영화인력으로 성장시키고 싶어하는 젊은 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화의 내일은 ‘있다’.

  우리에게 영화의 내일을 보장해 준 가장 근사한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우리 한국 영화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화의 형식과 일상적 현실에 대한 칼날을 일상의 그림과 언어들로, 현실의 한 측면에 진실로 서 있는 그 불길함과 순수하지 못함과 절망을 아무런 연민이나 화해의 몸짓없이 무조로, 잔인하게,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영화로 담아냈다. 감독은 더이상 영화가 “거짓 희망을 주지 않기를, 애써 책임지지도 못할 동정의 눈길을 보내지 않기를, 당신 옆의, 내 옆의 이 모든 서울의 한 소시민들이 저마다의 울상을 감추고 헛된 욕망과 거짓말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를, 그건 그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가 무관한 삶의 또 다른 진실을 밝히기를, 살인과 폭력과 일상의 나락이라는 낭떠러지가 함께 히죽거리며 꿈틀거리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잔인한 메시지를 이렇게 잔인하게 말하는 한국 영화는 본 기억이 없다. 관객에게 영화로 꿈을 꾸는 대신 기괴한 익살과 유치로 역전된 카타르시스 속에서 진실이라는 실마리가 얼마나 큰 수확인지 모른다.

  새로운 것은 또 있다. 벌거벗은 수행자의 자기 존재에 대한 샤머니즘적 구도의 영화가 있다. 양윤호 감독의 『유리』가 그것이다. 박상룡의 원작의 힘을 제쳐두고, 그 젊은 감독의 영화는 엄청난 패기와 아집으로 일관하는데 그는 어느 선배 감독들의 동선상에도 놓이지 않는다. 원작의 제목과 영화의 부제가 시사하듯 수행은 ‘죽음에 관한 연구’가 되어 전개된다. 그것은 금기된 것, 살인을 통해 자신의 내적 존재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다. “마른 늪에서 물고기를 낚으랴”는 화두가 암시하듯 (주인공) ‘유리’는 탐욕과 질투와 광기가 번득이는 그가 살아가는 ‘유리’의 세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애욕을 탐하고 살인의 광기를 행함으로써, 그것의 보상으로써 눈먼 벙어리가 되어 결국 자신의 존재의 대답을 듣는 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얻은 대답이란게 뭔가. 우리가 사악하다고 제쳐 두었던 인간의 다른 한 측면의 본연에 말할 수 없이 충실하게 다가가서 그 다음에 진리의 문제에 답해보자는 것이 감독의 기획인 듯한데 그 깨달음은 감독의 지나친 자의식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곧 영화는 소통되지 않는 관념으로 넘쳐난다. "유리"가 "유리"의 세계에 갇히듯이 감독은 자신의 난해한, 신화적이고 토속적인 그림들에 갇혀 버린다. 결국 유리가 얻은 존재의 대답이 무엇인지를 대부분의 관객은 모를 것이며, 그러므로 영화는 공명을 얻지 못한다. 구도에 대한 자신의 상상력을 마구 저질러 버린 듯한 그것을 감독은 "자유롭고 싶었다"는 말로 자랑한다. 그러나 영화의 그 낯선 그림들이 형식의 미학으로 상승되기에는 그 의욕을 충족시킬 만한 내용상의 대응이 없다. 모호한 관념들의 제어되지 않은 유희가 보일 뿐이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관객이 있고 또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감독이 있다는 측면에서는 그 패기가 인정해 줄 만한 영화지만 역시 영화는 언제나 욕심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그 영화를 실험과 컬트의 경계에 놓고 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외국에서는 그 영화를 낯선 한국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영화언어로 부를 것이다. 오갈데 없어진 사람들의 사랑이야기로 사람들을 울리는 장현수의 『본투킬』은 죽었다. 그의 매력적인 영화적 감상주의를 관객은 의외로 외면했고, 강우석의 『투갑스Ⅱ』의 관객 사로잡기는 그 전 시리즈의 절반쯤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보다 전에 우리는 장선우의 변덕을 또 한 번 확인했다. 통속의 극치를 역전시켜 현재의 익명과 불확실성을 풍자했던 포르노 그라피에서 이제 그는 여전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광주의 이야기를 『꽃잎』에 실었다. 천년의 사랑과 스릴 그리고 SF가 만난 『은행나무 침대』는 올 상반기 최대의 흥행 영화가 되었다. 흥행은 우습게 볼 것이 못 되는게 그 영화가 관객의 판단으로 재미있고 볼 만한 것이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다. 한편의 영화의 훌륭함이란 반복과 상투성을 가지고 또 관객을 매혹시킬 수 있는가의 여지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제규 감독은 재능있는 감독이다. 여균동 감독의 『맨』은 그 감독의 연출력이 연기력만 못했는 모양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너무 도를 지나치게 감독이 자신의 감수성에 집착하고 그래서 영화가 장난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그 때문인지 영화는 흥행, 비평에서 실패하고 그 감독은 그전 작품에서 기대되었던 그의 역량을 다시 검증하지 못했다. 왜 그는 자신의 끼를 연마하지 않고 계속 저지르기만 하는 것일까?

  이후로도 충무로에서는 많은 영화가 만들어 질 것이다. 대기업의 투자를 받던 사채 돈을 끌어다 쓰던 한국의 영화는 여전히 그 생명력을 연장해 갈 것이다. 지금 당장 신문을 들춰 극장에 걸려 있는 한국 영화가 몇편인지를 세어보라. 만만치 않을 거다. 그 영화들 중에 당신이 본 영화는 몇 편이나 되는가?

/ 임혜원 (중앙대 영화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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