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대한 ‘승리’에 열광하는 한국의 ‘전국민’과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월드컵 열기를 부추기는 한국의 절대 대다수의 매체를 보면서, 그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근대적 국가주의의 대표적인 산물인 월드컵과 같은 국가간의 대형 스포츠 경기는, 온갖 ‘포스트’를 내세우는 이 시대에 왜 계속 존재하는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대중의 ‘자발적인 동원’을 이끌고 단기간이나마 이목을 절대적으로 독점하는 판이다.

  근대의 대형 스포츠가 국가주의·군사주의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쉽게 의식하는 바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19세기말부터 하류층과 지배층이 함께 어울려 즐길 수 있었던 국가간의 대형 경기를, ‘전국민적 통합’의 방편 즉 실재의 계급적 모순들을 ‘국갗, ‘민족’이라는 허위의식의 선포·강조를 통해서 호도하는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스포츠 단체들이 극단적인 국수주의의 온실로 되는 것도, 스포츠 경기의 관중들이 ‘국갗, ‘민족’별로 나누어져 가끔 격렬한 주먹다짐을 벌였던 것도, 이와 같은 의도에 그대로 부합되는 면이 컸다.

  주요 부르주아 신문들이 지금의 보수 일간지도 그렇듯 ‘축구 불량배’들을 비웃고 매도했지만, 서로 다른 나라들의 가난뱅이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는 대신에 ‘국갗를 중심으로 뭉치는 것에 대해서 크게 흡족해했다. 자본주의 세계는 제1,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살육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을 때, 대형 국제 스포츠는 공공연하게 ‘전쟁의 연습’으로 불러졌다. 선수와 그들을 영웅으로 삼는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힘과 담력을 키우고, 관중이 ‘애국심’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거는 간판이 각각 다르지만, 실제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인 병영 국갗라는 공동 분모를 가지는 남·북한에서는, 국가적 규모의 스포츠를 ‘전국민적 통합’ 식의 세뇌의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유럽 이상이었다.

  박정희 시절의 남한에서는, 축구 시합에서 일본을 ‘이기는 것’을 ‘화랑 정신의 발로’로 극찬했고, 축구 선수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전두환의 도당이 상업주의라는 새로운 요소를 가미시켜 ‘스포츠 공화국’의 모습을 세계에 나타냈다. 공안꾼들과 구사대의 깡패들이 관료·자본 독재의 ‘채찍’이었다면 대형 스포츠는 대중의 욕망을 그나마 충족시키는 ‘당근’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이미 ‘대상’이 아닌 ‘주체’를 자임하는 ‘국가관’과 ‘국민적 통합’을 더 이상 좋은 의미로 들먹이기가 쉽지 않은 지금의 한국에서는, 왜 ‘우리가 이겼다’는 소리가 그만큼 계급과 정치색을 초월하고 우렁차게 들리는가? 이유야 물론 매우 복합적이다. 예컨대, 월드컵의 각종의 상업적인 ‘장삿속’도 ‘국민적 통합’의 메커니즘에 이미 익숙해진 ‘습관화된 동원’의 효과도 무시 못할 요인이 되겠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아직도 여론 조작의 상당한 능력을 가진 매체들의 ‘이벤트 만들기’ 전략이다. 자본·국가에 예속된 ‘주류’ 대형 매체는 기본 체제에 위험한 이 세상의 진실을 결코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나이키의 운동화를 만드는 인도네시아의 하청 공장의 노동자들이 하루에 5분 이상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게 돼 있다는 이야기나, 운동화를 비롯한 온갖 소비재를 생산하는 외국 자본의 중국 공장에서 1년에 5만 개의 손가락이 잘린다는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한다면 해외 투자를 도덕적이며 서로 좋은 것으로 보는 지금의 통념이 그대로 남겠는가? 나아가서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도덕적인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류’ 매스컴에 대중의 주목을 완벽하게 끌 수 있는 그러나 그러면서도 체제에 무방한 ‘이벤트’는 절실히 필요하다.

  월드컵 정도면 매체에 더함 없는 ‘축복’이다. 폴란드에서 한·폴 경기를 숨을 죽여 보는 망한 대우의 폴란드 공장의 노동자들도, 한국에서 똑같이 관전에 열중하는 그들의 한국 동료들도, 적어도 그 순간에 재벌의 부패와 횡포, 정부들의 무책임과 무능력에 대해서 까먹는다. 그것이야말로 승리다. 자본과 매체의 승리란 말이다.

/ 박노자(오슬로국립대·한국학·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