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를 떠올려보면 유명한 남성 철학자들밖에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많은 여성철학자들은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크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학술부에서는 이러한 여성철학자들을 다음의 순서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①히파샤
②올랭 드 구쥬
③메리 울스턴크래프트
④한나 아렌트
⑤시몬느 드 보브와르

  히파샤(Hypatia, 370-415)

  미국에 『히파샤』라는 페미니스트 철학 잡지가 있다. ‘히파샤’라는 잡지명은 후기 고대의 한 이집트 여성 철학자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리고 이 잡지의 서두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로 하여금, 비록 우리들 중 많은 이가 우리가 속한 학파에서 최초의 여성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역사상 처음은 아니었음을 상기시킨다.”

  히파샤는 서기 370년경에 역시 철학자인 테온(Theon)의 딸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여성 철학자로서 플로티누스가 이끈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대표자였다. 그녀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에 해당했던 무세이온에서 철학과 수학 그리고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녀의 열정적 강의와 특별한 지성 그리고 빼어난 아름다움은 고대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여성 학자의 모습을 구현한 것으로서 사람들의 상당한 경외와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강의를 위해 많은 텍스트를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 기하학자인 디오판토스의 『산술학(Aritmetica)』에 대한 13권짜리 주석서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철학적 관점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형이상학적 사변에 몰두한 아테네의 신플라톤주의 학파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전개했을 것이라는 점만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지적 분위기로 보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러 서신이나 일부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그녀의 학문적 성과나 명성에 비해 오늘날 철학사나 사전 등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녀 이전에 그리고 그녀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랬듯이 숨겨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여성 철학자 혹은 여성 학자들은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이 그나마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녀가 겪은 끔직한 죽음 때문이다.

  히파샤는 당시 광적인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교도 철학자로 찍혀, 교회로 끌려가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었고 토막난 시체는 불에 태워졌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하는 이행기에 일어난 끔찍하고 치욕스런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단지 일부 광적인 기독교인들의 만행에 그치지 않고, 아무런 주저나 망설임 없이 남성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자유로이 활동했던 한 여성 학자에 대한 적대감의 절정이기도 했다. 또한 히파샤는 그 후 이어지게 될 마녀 사냥과 같은 ‘여성 혐오주의’의 첫 번째 희생자이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는 여전히 히파샤에게 씌워진 비극의 그물을 걷어내고 당당하고 열정적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줄 또한 그녀의 지적 성취를 접하게 해 줄 연구물들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삶과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다룬 소설이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위안이다. 그녀를 다룬 소설로는 찰스 킹슬리의 『히파샤』(1857)와 아눌프 찌텔만의 『히파샤』(1988)가 있다.

- 이 글은 마리트 룰만(Marit Rullmann)이 편집한 『여성 철학자들(Philosophinnen)』의 히파샤편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Rullmann, M.(Hg.), Philosophinnen/ Von der Antike bis zur Aufklaerung, Suhrkamp Taschenbuch Verlag, 1998.

/ 하주영 (울산대 철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