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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명문장]“나는 팔대부의 자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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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12.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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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 나는 사대부의 자손으로……
선비 : 뭣이 사대부? 나는 팔대부의 자손일세.
양반 : 팔대부는 또 뭐냐?
선비 : 팔대부는 사대부의 갑절이지.
양반 : 우리 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이거든.
선비 : 아, 문하시중? 그 까짓 거, 우리 할아버지는 문상시대인데.
양반 : 문상시대? 그것은 또 뭔가?
선비 : 문하보다 문상이 높고, 시중보다 시대가 더 크다.
양반 : 그것 참 별꼴 다 보것네.
선비 : 지체만 높으면 제일인가?
양반 : 그러면 또 뭣이 있단 말인가?
선비 : 첫째 학식이 있어야지, 나는 사서삼경을 다 읽었네.
양반 : 뭣이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을 다 읽었네.
선비 : 도대체 팔서육경이 어데 있고, 대관절 육경은 뭐꼬?
초랭이(양반의 하인) : 나도 아는 육경! 그것도 몰라요? 팔만대장경, 중의 바래경, 봉사 안경, 약국 길경(약재이름), 처녀 월경, 머슴 새경.
이매(선비의 하인) : 그거 맞다. 맞어. 양반 : 이것들도 다 아는 육경을 소위 선비라는 자가 몰라?

- 안동 하회 별신굿 가운데서

  양반탈을 쓴 광대와 선비탈을 쓴 광대의 이 엉터리 같은 대화는 경상도 안동지방에 전해오는 탈춤놀이 하회 별신굿의 한 도막이다.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은 이 기막힌 양반, 선비의 대화에 배를 잡고 웃으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야, 팔대부가 어디 있냐, 문상시대는 또 뭐야? 대단한 조상이구먼”, “선비가 육경도 모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조선의 양반지배체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옛 양반의 권위는 퇴색되어 갔고 경제적으로 양반의 권위를 지키기 어려운 몰락 양반들이 많이 생겼다. 하회탈춤에서, 양반이 평민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실학자이던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는 양반이 도둑놈이 되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에 살던 한 양반은 어질고 학식이 높아 군수가 부임하면 직접 찾아와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 양반이 워낙 가난해 해마다 고을의 환곡을 빌어다 먹었다. 몇 해를 그러다 보니 빚진 곡식이 천석을 넘었다. 어느 날 관찰사가 그 고을에 들러 환곡장부를 조사해보고는 크게 화를 내고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했다. 군수가 차마 가두지는 못하고 고민했다. 마침 마을의 부자가 있다가 양반의 환곡을 대신 갚아 주고 양반을 사기로 했다. 그래서 군수의 주선아래 양반 매매 문기를 만들게 되었다.

  “양반은 오경이면 일어나 유황 등잔에 불밝히고… 세수할 때는 주먹으로 비비지 말고, 양치질할 때는 후루룩 소리를 내지 말고… 손으로 돈을 만지지 말고, 쌀값이 얼만가 물어보지 말고,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막걸리를 마시고 수염을 손바닥으로 닦지 말고, 담배를 필 때는 볼따구니가 움푹 패이도록 빨지 말고, 아무리 성나도 마누라를 패지 말고, 그릇을 던지지 말고….”

  문기에 적힌 양반의 조건이 온통 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밖에 없자 갑갑해진 부자는 양반이 되면 좋은 점이 무어냐고 군수에게 물었다. “이웃집 소를 끌어다 자기 땅을 갈고, 마을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맨들 누가 감히 양반을 괄시하랴? 백성의 코에 잿물을 들이 붓고, 머리끄덩이를 휘휘 돌리고, 수염을 낚아채더라도 누가 감히 원망하랴?” 이 말을 들은 부자는 기가 막혀, “그만 두시오. 그만 두어, 맹랑하구먼.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인감?”하고는 천석의 쌀을 포기하고 양반을 도로 물렀다.

  양반 지배체제가 허물어져 가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양반의 지위를 강조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양반전』의 양반의 조건에서 보듯이 조선말기의 극도로 형식화된 예학은 무너지는 양반사회에서 양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나 마찬가지였고, 하회 별신굿에 나오는 양반·선비의 문벌·학식 자랑은 일반 평민에게도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 하원호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연구교수· 「한국민족운동의 전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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