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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벌레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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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09.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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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의 그림 (이수명)

벌레 한 마리 뒤집혀져 있다.
바닥을 기던 여섯 개의 다리는 낯선 허공을 휘젓고 있다.
벌레는 누운 채 이제 닿지 않는 짚어지지 않는 이 새로운 바닥과 놀고 있다.
다리들은 구부렸다 폈다 하며 제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는 허공의 포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허공의 만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거기에 그림을 그린다.

  벌레 한 마리가 뒤집혔습니다. 저는 풍뎅이쯤으로 상상하고 싶습니다. 은갈색이었던가, 은초록이었던가, 그 등껍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검지손가락으로 휙 뒤집어 버리곤 했었거든요. 그러면 그 또렷한 여섯 개의 다리가 정말로 “낯선 허공을 휘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머리 속에 떠오른 풍뎅이를 지워버리고 다시 그냥 ‘어떤 벌레’를 대충 머릿속에 그리기로 합니다.   다시 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버둥거리는 풍뎅이의 모습을 “새로운 바닥과 놀고” 있다는 말에 대응시키는 건 어쩐지 폭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가령 사투를 벌이는 암벽등반가의 절박함을 ‘수직의 땅바닥과 놀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건 지독한 무례함이 아니겠어요?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듯, 풍뎅이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하겠지요.

  실재하는 풍뎅이를 어떤 알 수 없는 벌레로 머리 속에 바꾸어 떠올리면, 닿지 않는 바닥에 다리들이 “구부렸다 폈다 하며 제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다”는 표현은 몹시 매혹적으로 들립니다. 온 몸이 중추 신경에 제어받지 않고 제각각 움직이며 제각각 다른 그림들을 펼친다는 거, 그것도 일용할 양식을 위한 게 아니라 그냥 놀이라는 거―,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문득 저는 벌레의 이 움직임이 저의 것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풍뎅이를 지워버린 자리에 제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것이죠. 아마 이 시인 역시 시를 쓰면서, 얼마쯤은 이 벌레를 꿈꾸지 않았나 싶어요. 벌레인간이라고 꼭 징그러울 이유만은 없을 테지요.

/ 신지연(시인·기초교육대학 교양작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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