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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하고 나이들게 하여 저승으로 이끄네"
- 쿠르드족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쿠르드족 출신의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국경 주변(쿠르드족이 사는 지역은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 아이들의 고달픈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 나오는 쿠르드족의 어린 아이들은 정신 없이 일한다. 어떤 아이들은 능숙한 솜씨로 물건을 포장하고, 또 다른 아이들은
자기 몸집만한 물건을 놀라운 속도로 운반한다. 아이들은 컨베이어 벨트가 없어도 정말 빨리 움직이면서 일을 한다. 강도 높은 노동이 이어진다.
이윽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트럭에 올라타는데 이 트럭은 이라크와 이란 사이의 국경을 지나 쿠르드족이 사는 마을로 들어간다. 이 트럭
안에서 아이들은 다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아, 이것을 어찌
아이들의 노래라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동요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가요의 개념이 이 아이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흔히
성인이라고 인정되는 20대라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그리고 자신들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살아보기도 전에 “인생은 나를 떠돌게 하는 것"이며, 결국
나를 “저승으로 이끄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국경을 지나 마을로 돌아오면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버지들이 귀환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우리는 가족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버지들은 어디를 갔다 왔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절망에 찬 비명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본래 이라크 북부는 전제 경작 면적의 50% 가까운 농토를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지만 이란과 이라크의 긴 전쟁을 통해서 북부 지역은
지뢰밭으로 변해버렸고, 1988년 독가스를 이용한 후세인의 쿠르드족 학살로 대표되는 이라크인들의 끊임없는 핍박, 300만명 이상의
강제 이민과 3만명 이상을 학살한 터키의 쿠르드족 정책(얼마전까지 터키는 미국의 묵인하에 쿠르드족 마을을 폭격했다), 그리고 미국을 필두로 한
중심부 국가들의 착취와 반(半)주변부 국가들의 공모는 쿠르드족으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 부근에서 밀수를 하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주인공 ‘아윱’의 아버지 또한 마을의 다른 가장들처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밀수에 나섰지만 국경에 깔려있는 지뢰를 밟고
폭사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죽은 이상 아윱이 아무리 어린 소년이라 하더라도 그는 가장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아윱은 여동생 아마네와 심각한 장애로 인해 목숨마저 위태로운 남동생 마디를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윱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던 대로 국경에서 밀수를 하기 위해 노새를 끌고 나선다. 우리는 여기서 한편의 시 제목처럼
읽히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는 영화 제목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이들이 밀수를 하는 시기는 눈이 많이
내려 도로를 사용할 수 없는 겨울에야 가능하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쿠르드족이 사는 지역은 북부
지역이면서 고지대이기 때문에 눈이 많이 내리고 무척이나 춥다. 그래서 이들은 밀수를 떠나기 전에 노새나 말이 얼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동물들이 마시는 물에 술을 타서 먹인다. 별로 춥지 않은 날은 1병, 정말 많이 추운 날은 4병,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술을 먹여
술기운이 올라 비틀거리는 말과 노새를 아이들은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끌고, 지뢰와 이라크 인들의 매복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국경으로
힘겨운 이동을 하게 된다. 정말이지 이 아이들은 고작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거는 밀수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성장기 혹은 사춘기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거나, 오더라도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성장의 아픔을 겪는다고 해서 장미빛 미래가 주어진다는 것은, 목숨 걸고 밥값을 벌러 다니는 이 아이들에게는 정말 말 그대로 사치스러운
생각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장 영화에서 흔히 떠올리게 되는 아이들의 섹스에 대한 지독한 궁금증(<아메리칸 파이>,
<나에게 유일한>)이나,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와 획일적 삶에 대한 고민(<죽은 시인의 사회>), 학교 선생님에 대한
연정(<몽정기>나 <내 마음의 풍금>)등을 이 영화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이와 시간상으로는 중심부와
반주변주 국가들의 소녀·소년들과 같은 성장기를 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 아이들은 정확하게 정반대의 고민을 떠안고 같은 시간대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지독한 비동시성의 동시성!
영화처럼 현실 또한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단지
불쌍하게만 여기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 타인의 고통과 연결될" 수도 있음을 숙고하지 못하거나(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 “우리가 누리는
사소한 안락함이 다른 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는(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 오라』) 것이며, 결국
어떠한 행동도 수반되지 않는 그냥 연민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란과 이라크간에 펼쳐졌던 가혹한 전쟁,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핍박이 이 지역의 아이들에게 가혹한 삶을 제공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속적으로 경제제재를 펼치며 오로지 석유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중심부와 반주변부 국가들의 온갖 착취와 공모가 있었기에
또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라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쿠르드족 아이들인 아윱과 아마네, 그리고 마디와 다른 나라의
소녀·소년들(예를 들어 미국, 유럽, 한국 등)은 만날 일도 없거니와 서로를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을 바흐만 고바디는 카메라를 통해서
우리에게 고통스럽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일하러 나가는 아윱에게 여동생 아마네는 공책 한 권을 부탁한다. 혹은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부탁할 수 있을
뿐이다. 불치병에 걸린 남동생 마디를 수술시키기 위해서 아윱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삶만을 살 수 있는
아이들의 노래 속에서 등장하는 인생은 결코 즐거운 것일 수가 없다. 오늘도 이 아이들은 하루 생계를 위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국경을 넘어간다. 다른 곳에서의 어린 소녀·소년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을 것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 박성호 (사학과 2004년 졸업·유학 준비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