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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당일 새벽까지 기말 과제를 마감하고 부랴부랴 달려온 낯선 땅, 필리핀. 이곳에 온지 벌써 1백일이 지나고 있는 지금, 한국
유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낯선 환경에서 발휘 되고 있는 각자의 놀라운 적응력에 스스로 감탄을 하곤 한다. 숨통을 조이는 무더위,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불쑥 찾아오는 향수…
강도 높은 커리큘럼, 현지인도 수강철회
그러나 유학생들을 가장 힘겹게 만드는 것은 엄청난 과제가 쏟아지는 전공 수업이다. 영어 실력이 우수한 현지 학생들이 수강하기도
버거운 전공 수업을 필리핀에 막 온 한국 학생들이 듣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다. 중학교 때 필리핀으로 유학을 와서 8년 째 현지 생활을
하고 있는 김호경(UP 생물학과·22) 씨는 “영어에 능숙하다고 자부하는 나도 전공 수업을 듣는 게 버겁다”고 털어 놓으며, UP에 교환
학생으로 와 있는 한국인 학생들에게 “안타깝지만 높은 학점을 받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다”고 충고한다. ‘필리핀 최고의 국립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교수들은 강도 높은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현지 학생들조차도 ‘학기 중 철회’라는 마지막 노선을 택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 교환학생 최명열(가명·W대 전자공학 ·24) 씨는 “필리핀에서 이수한 학점을 한국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D'를 받겠다 싶어서 철회했다”고 말한다. 학기 초 총 3과목을 신청했던 그는 전공 수업 두 개를 철회하고 현재 교양 수업 하나만 수강 하고
있다. 최 씨는 “한국에 돌아가면 마지막 학기에 20학점은 들어야 졸업할 수 있다”며 한숨을 내쉰다.
외세 영향으로 수업도 서구식 토론 강의
필리핀 대학의 또 다른 강점은 소규모로 운영되는 수업이다. 몇십명 씩 빼곡히 들어 앉아 대형 강의가 이뤄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의 클래스는 보통 20명 가량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다. 자연히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로 수업이 이뤄진다기 보다는 학생과 교수가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한 학기가 흘러간다.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은 이 같은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스페인의 3백년 통치가 낳은 서구식
강의 문화는 때로 수업 도중 책상에 걸터 앉아 청강하거나, 식사를 주섬주섬 먹는 학생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교환 학생들, 5학년 1학기 각오해야
이렇듯 대부분의 교환 학생들은 큰 부담을 안고 수업을 수강하고 있지만, “학점은 애초에 포기했다”며 “수강 자체에 의의를
둔다”는 학생들도 많다. 교환 학생 김명진 (가명·M대 경영·22) 씨는 “UP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대에 해당하는데, 여기에서 필리핀
수재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라고 전한다. 사실, 한림대의 교환 학생 중에서도 5학년 1학기를 다니는 상황까지 각오하고
이곳에 온 학생들이 꽤 있다. 외국 대학에서 강의를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이기 때문에, 한 학기 정도 졸업이 늦어지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단 최선을 다하고 보자”는 반응들이다. 때문에, 기숙사 스터디
룸에서 안경을 콧등까지 내려쓰고 프린트 뭉치, 사전과 씨름하는 한림대생들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만도 않다.
대통령 관저 방문, 대변인 만나기도
기자는 UP 언론 전공생들 사이에서도 악명 높은 과목 중 하나인 ‘News Rrporting'을 수강하고 있다. 도중하차하는
학생들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귀띔해 줬던 필리핀 친구 샘(sam)은 아직도 기자가 그 수업을 좇아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Good"이라고 말했다. 물론 수강 신청 당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던 탓에 벌어진 일이지만 이 수업 하나만으로도 기자는 한 학기
동안 얻은 수확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매주 제출했던 과제 기사들에서 비록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지만, 필리핀 주요 국가 기관들을 견학한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출입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받아내기 방문했던 말라카나 궁(대통령 관저)에서 문공부 장관(Press
Secretary)의 기자 회견에 참석한 후, 그날 저녁 뉴스에 기자의 뒷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설레이던 일. 아직 통과 되지 않은 법안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찾은 의회에서, 이혼이 법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놀랐던 일. 대법원 출입 기자들을 만나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에 감동 받았던 일 등은 한국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일들이기에 더욱 더 값지다 하겠다.
/ 이지현 리포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