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별들의 연대

  트윈 옥스 3주 방문자 프로그램이 끝나고 며칠이 더 지났다.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마땅치가 않다. 추수 감사절이 지나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미국 전체가 휴일 분위기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어스 헤이번(Earth Haven)과 테네시 주의 팜(The Farm) 공동체에 편지를 띄어 봤지만 많은 공동체 사람들이 곧 가족들을 찾아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잘못하면 내년 1월 초까지 아무 곳도 가지 못할 상황이다. 이때 마침 미주리 주 이스트 윈드(East Wind)에서 FEC(The Federation of Egalitarian Communities. 평등주의 공동체 연합) 정기 모임이 열리고, 그곳에 트윈 옥스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그들이 타고 갈 자동차는 이미 가득 차서 함께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차편으로라도 갈 수만 있다면 모임에 참여할 수 있고, 원한다면 그곳에서 더 지낼 수도 있다는 거다. 결국 윌로우(Willow)라는 키 큰 사내의 차를 얻어 타고 이스트 윈드로 갈 수 있게 됐다.

  매년 미국 서부에서 동부로, 다시 동부에서 서부로 옮겨 다니는 그가 막 트윈 옥스로 오고 있는 중이란다. 곳곳의 공동체마다 친구가 있는 그는 틈틈이 일을 해서 여비를 마련하고 공동체의 친구들을 찾아 동서를 오가는 ‘방랑자’이다. 일로우 덕분에 버스로 스무 시간이 걸리는 자동차 여행을 무료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모든 공동체가 내 집 FEC는 사회적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미국 공동체들의 연대 모임이다. 이미 소개한 에이콘, 트윈 옥수, 이스트 월드와 앤드 힐(Sand Hill), 스카이 하우스(Sky House) 등 미국 곳곳에 있는 공동체들이 참여해 교류와 연대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각 미국 사회에서 이런 공동체들은 주류 사회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섬 또는 행성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공동체 운동은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여러 공동체들은 오래전부터 FIC(The Fellowship of Intentional Communities. 공동체 운동 협회)와 FEC 같은 모임을 만들어 운동의 영역을 넓히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누구 말처럼 행성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셈이다.

  이스트 월드에 모인 FEC 사람들은 먼저 회원 공동체들의 소식을 나누고, 사업과 예산 검토 등 기본적인 안건을 다뤘다. 그리고 이스라엘 키부츠 탐방이나 공동체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 진행 중이거나 준비 중인 공동 사업에 대해 집중 논의를 했다. 모임의 최대 안건은 아무래도 장기 계획 논의(Big Picture Show)였다. “FEC의 제일 중요한 목적은 무엇인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동체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새로운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등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졌고 끝이 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한참 토론을 해서 어느 정도 생각이 모아지는가 싶었는데 이스트 월드의 아비바(Aviva)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글쎄,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 중에 얼마가 FEC의 정체성과 장기 계획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할까요? 공동체 안에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가득 있는데 밖의 일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있기나 할까요?”공동체 회원이 아닌 나도 맥이 빠지는 소리였다. “그렇게 얘기해 버리면 지금까지 한 얘기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나도 모르게 걱정이 들고, 한편으로는 답답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랐다. 트윈 옥스에서 온 스카이(Sky)는 “맞아요, 그런 입장이나 느낌을 그냥 지나쳐버리면 안 되죠. 그런데요, 매일매일 부딪치는 공동체의 실제적인 문제 속에서 우리가 함께 하고 해결 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요? 그걸 놓치지 말아야 할 거예요. 그게 공동체로 사는 이유라고 생각해요.”단정적이거나 일방적인 이해를 강요하는 의도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마음 편하게 갖고 함께 가자는 거였다. 이들의 다른 행성에 대한 배려는 조금은 낯설은 ‘노동 교환’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FEC 회의가 열리는 빛의 집(Light House)에서는 트윈 옥스 사람들을 몇 명 찾아 볼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이 사람들이 멀리까지 와서 왜 게으름을 피우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건 한참 어긋난 것이었다. 그들은 대표자 한두 명을 회의에 보내고 작업장에서 일손을 돕고 있었다. 이스트 윈드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FEC 모임 참석을 겸해서 일을 돕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왔던 거였다. 이렇게 다른 공동체의 일을 도우면서 실제적인 어려움을 지원하고, 공동 노동을 통해 서로를 알아 가는 것이 이 노동 교환의 목적이다.

  FEC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회원 공동체에 가서 일을 할 수 있고, 그 활동은 원래 소속된 공동체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된다. 사실상 모든 공동체가 자기의 집이 될 수 있다. 혼자만 외롭지 않다. 닷새 동안의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떠났다. 성탄절이 5일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이스트 윈드 사람들도 많이 집을 비웠다. 1973년에 시작된 이스트 윈드는 현재 아이들까지 합쳐 60여명이 살고 있는데 반 정도가 집을 비워서 한적하기 짝이 없다. 한 해 동안 공동체를 먹여 살린 땅콩 버터 기계도 잠시 가동을 멈췄고, 해먹 작업장에도 사람들 발길이 별로 없다. 사람들을 사귀려면 공동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데 그럴 수가 없다. 이방에서 온 손님에게는 이보다 더한 형벌은 없으리라. 결국 지병인 외로움이 도져버렸다. 할 일 없이 내 방과 공동체 식당을 오가다가 해가 지면 음악 감상실로 갔다. 유일하게 담배와 맥주가 허용되는 공동의 공간이다. 맥주는 아예 공동체 안에서 담가서 기록을 하고 빼 먹을 수 있게 해 놓았으니 외로움에 대한 별 묘약을 못 찾은 사람의 피난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피난처에서 더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 I는 약물 중독 때문에 앞니가 빠졌다. 여자를 사귀고 싶지만 “여자는 외모가 멋있는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엽자기 같은 사람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숲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 위에서 살던 E는 아내와 이혼을 해야만 했다. 그는 지금 버스로 만든 집에서 산다. F는 새 부모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은 사회적이지 못하다고 생각을 한다. A는 어린 나이에 이혼을 경험했고, 약물 중독으로 병원 신세까지 졌었다. 모두들 새로운 행성을, 아니 새로운 세계를 찾아 집을 나섰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이곳이 영구히 정착할 수 있는 곳인지 모르지만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라고 몰아붙이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다르거나,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당하지 않아서 너무 마음이 편하단다. 분명히 나는 취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모두 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로의 외로움도 알고,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게 묘약을 주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원충연 http://wonshi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