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너머로 보이는 무표정의 사람들. 일터의 고단함을 잠시 잊으려 감어 버린 두 눈. 처량한 하모니카 소리를 울리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으는 맹인. 큼직한 여행용 가방을 이리저리 몰며 상품 판매에 열을 올리는 잡상인. 지하철 안에서 그려지는 도시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을, 역 주위를, 오고가지만, 이들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막들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는 것 같다.    

김민기가 번안ㆍ연출을 맡은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대도시의 상징인 지하철을 둘러싸고 만나게 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노래에 실어 담아낸다. 외환위기로 암울하기만 했던 90년대 후반이 배경이지만, 강렬한 음악과 톡톡 튀는 대사들이 관객들을 쉴 새 없이 몰아 부친다. 이미 94년 초연 이래 14년 동안 4천여회의 공연을 이어오며, ‘한국의 대표적 뮤지컬’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01년부턴 해외로도 진출해 독일, 중국, 일본의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 록뮤지컬 <지하철1호선>의 한 장면. '선녀'는 '청량리588'에서 '안경'과 '걸레'를 만난다. 사진출처 : www.line1.co.kr

작품은 연변처녀 ‘선녀’가 백두산에서 풋사랑을 나눈 한국남자 ‘제비’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오면서 시작된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제비’가 건네준 주소인 ‘청량리 588’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그가 설명한 ‘독립군로’가 아닌 사창가. 거기서 사창가의 ‘주먹’인 ‘철수’와 창녀 ‘걸레’, 운동권 청년 ‘안경’ 등을 알게 된다. ‘선녀’는 이어 그 주위를 방황하며 실직 가장, 가출 소녀, 취객, 소매치기 등을 접하게 된다. 순박한 그녀의 눈앞에 한국사회의 어두움과 피폐함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극의 클라이맥스. ‘걸레’가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 내려 자살한다. 마약과 절망에 찌든 가운데서도 ‘안경’의 순수함을 사모했던 그녀. 하지만 ‘안경’은 사칭 운동가이며 거짓 불구자였음이 밝혀진다. 자신에게 동침을 요구하는 ‘안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더 이상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선녀’ 또한 ‘제비’를 찾게 돼 자신의 임신을 알리지만, 그는 여자들을 ‘후리’며 사는 제비족일 뿐이다. 보름달이 휑한 늦은 밤. 자신의 위선을 참회하는 ‘안경’과 다시금 희망을 찾아 떠나는 ‘선녀’가 두 손을 맞잡는다.  

뮤지컬을 감상하고 거리를 나서면 일상생활이 조금씩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 주위의 무수한 아픔들이 발걸음마다 차인다. 타인의 외마디 비명 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다. 내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얼굴’이 망막을 거쳐 인식의 영역까지 넘어온다. <지하철 1호선>은 이렇게 무채색의 회색인들에게 때론 유쾌한 웃음으로, 때론 애절한 감정으로 삶의 이면을 바라보라고 다독거린다.  

▲ <지하철1호선> 공연이 끝나고 '배우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사진출처 : 교수신문

이황의 조연출가는 “1998년 서울의 모습을 한 폭의 풍경화로 남기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어 “모든 것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어두운 면은 되도록 간과하려 한다”며 “작품을 통해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행복을 꿈꿔 봐 너에게 찾아올 거야. 그건 언제라도 바로 오늘 중에도. 아주 작게, 아니면 엄청난 기적처럼.” ‘선녀’가 떠나간 ‘걸레’를 그리며 부른 노래다. 공연의 막이 내린 후. 저 나지막한 희망가를 ‘살아’있는 내 주위의 ‘걸레’에게 들려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 <지하철1호선> 상시공연안내

/ 엄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