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11살 때 부터였다. 11살 때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방이 생긴 후에도 잠을 잘 때면 나는 늘 동생 방에 베개를 들고 갔다. 그 좁은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옆에서 내 몸을 지그시 눌러주는 누군가가 없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항상 나보다 용감했던 남동생은 불평을 했다. 둘이 자기에는 비좁은 방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내 방에서 혼자 자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불을 켜 놓고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지면 불을 꺼야지 라고 다짐했지만 번번이 나는 불을 끄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마다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불을 끄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방은 베란다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밖에 있는 가로등 불빛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불을 꺼도 그리 어둡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끔 늦게 들어오는 자동차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출 때면 방은 순간 환해지곤 했다. 처음에는 깜짝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어느 새 불빛에 익숙해 졌다. 그리고 라디오를 틀어 놨다. 밤마다 라디오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던 날에는 이국의 낯선 언어로 불려지는 10분이 넘는 노래를 듣기도 했다. 그런데 한번도 라디오를 틀어놓은 채로 잠이 든 적은 없었다. 눈꺼풀이 거의 감길 때쯤이면 손을 더듬거려서라도 라디오를 끄고 잠이 들었다.

결국은 주위의 적막함이 내 몸을 지그시 눌러줄 때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혼자 자는 연습이 완벽하게 몸에 배자 나는 더 이상 누군가와 잘 수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처음 갖게 된 1인용 침대 위에서 내 작은 몸은 마음껏 뒹굴며 잠을 잤다. 이불위에 따뜻한 담요를 몇 개 더 깔고, 그 위에 두툼한 솜이불을 갖다 놓았다. 나는 그 속에 들어가 꼼지락 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엄마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올라치면 나는 끊임없이 뒤척여 엄마를 나가게 만들었다. 어떤 날은 아랑곳 않고 깊은 잠에 빠져버린 엄마를 원망하며 날이 새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했다. 침대가 좁아서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제 사람의 체온이 나를 눌러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가로등 불빛이나, 라디오 DJ의 목소리, 새벽의 기운들이 나를 눌러주었을 때 더 깊이 잘 수 있었다. 엄마는 가끔 살갑지 못한 나에게 서운해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옆에서 자는 엄마를 안을 수 없었다. 어쩐지 내 옆에서 자는 엄마는 낯설었다. 엄마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지금 내가 혼자 살고 있는 것도 집과 안정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기차로 2시간 이상 떨어진 거리만큼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내 마음이 가장 불안했던 시기는 집 안에서 모든 방이 나의 방과 2초 내에 닿을 수 있을 때 였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놀라지 않았다. 짐을 싸고 용달에 짐을 싣는 나를 엄마는 담담하게 바라봤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4층짜리 다세대 주택이다. 꼭대기 4층에는 주인집이 살았고 3층부터 지하까지는 나 같이 혼자 사는 사람들이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이곳은 원룸 촌이었다. 대학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 대학의 학생인 듯 보였다. 매일 아침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는 나와는 달리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은 모두 달랐다. 아마 매일 달라지는 강의 시간표에 따라서 기상 시간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월요일 아침 나와 함께 집을 나서는 사람은 꼭 월요일만 만날 수 있었다. 목요일에 나와 함께 문을 나서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었다. 대개 아침 일찍 수업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했다. 8시부터 샤워기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방은 한두 개 정도였다.

나는 2층에 살고 있었다. 2층에는 총 6개의 방이 있었다. 나는 오른쪽에 있는 3개의 방 중에 중간에 있는 203호였다. 내 맞은편은 원래 204호여야 하지만 주인아줌마는 모든 층에 4라는 숫자는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맞은 편 방은 205호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으로 이사 온지는 3년이 조금 못 되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나는 한 달을 꼬박 새웠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마다 밥을 먹는 대신 잠을 잤다. 집에서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방은 생활하기에는 좁았고, 누워있을 때는 넓었다. 203호는 철제 현관문 안으로 좁은 부엌이 있었고, 현관과 화장실은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현관과 방은 문턱 외에는 경계가 없었다. 문이 없이 그저 뚫린 방이었다. 그러니까 문이라고는 현관문 밖에 없었다. 누워 있으면 온 방안이 눈에 들어왔고,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2층에 사는 아이들은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새벽이면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술주정을 해대거나, 늦은 밤에도 복도에서 이 문, 저 문에 부딪치며 자신의 방을 찾는 아이들도 있었다. 너무나 생생한 그 소리들을 무시하고 잠을 청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름이 되던 날 나는 현관과 방의 경계를 짓기 위해서 두꺼운 커튼을 떼다 달았다. 밤이면 커튼을 쳤고, 더 이상 현관문의 작은 틈 사이로 센서 등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됐다. 소리는 막아 줄 수 없었지만, 막연한 공포심은 막아주었다. 커튼을 달고서도 보름 동안은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입이 부르트고, 눈 밑은 시커멓게 변했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주며 회사에서는 유령처럼 걸어 다녔다. 사람들은 따뜻한 우유를 마셔보라는 둥, 자기 전에 힘든 운동을 해보라는 둥 저마다 불면증에 대한 처방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파서 화장실만 들락 거렸고, 몸이 고단할 정도의 운동을 하고 나면 온 몸의 근육통이 생겨 욱신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모든 불면증이 끝난 것은 두 달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203호에 내 몸이 적응하는 시간은 두 달이나 걸렸다.

이제 나는 가구 배치를 새로 하여 현관문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불을 깔고 머리를 두고 잠을 잤다. 밖에서 나는 소음에도 귀가 무뎌지기 시작했고, 웬만큼 큰 소리가 나지 않고서는 잠을 깨지 않았다. 잠을 자기 시작한 순간부터 부르텄던 입 주변도 가라앉기 시작했고, 점심시간마다 졸지 않게 되었다. 나는 3년 가까이 203호에서 살고 있지만 주인아줌마와 마주 친 것은 5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조용한 입주자였다. 집에 친구를 데려오지도 않았고, 술을 마시고 큰 소리로 주사를 부리지도 않았다. 매달 20일마다 꼬박 꼬박 인터넷 뱅킹으로 방세를 부쳤고, 공과금도 매달 마지막 주가 되면 어김없이 입금했다. 3년간 이곳에 사는 동안 2층에는 몇 번의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들락거렸고, 새로운 방의 주인들이 들어 왔다. 그들은 1년, 혹은 6개월 단위로 사는 경우가 많았고, 대개 방학이면 두 달간 집을 비워두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방학 때 2층에서 불이 켜지는 방은 내 방 뿐인 적도 있었다. 누구도 다른 방에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안정적인 거리를 모두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한 나에게 그 거리는 아주 중요하다.

금요일 밤은 보통 늦게 잠을 잔다. 토요일에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늦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금요일 밤에는 일주일 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몰아서 하곤 한다. 빌려두었던 DVD를 보거나 늦은 밤에도 만들어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뎅강뎅강 소리를 내며 요리를 하기도 했다. 그날 밤에는 퇴근하면서 사온 캔 맥주를 앞에 두고 전망 좋은 방이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아주 오래 된 영화였다. 영화가 끝났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맥주 한 캔에도 내 얼굴은 쉽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귀에서 목까지 벌겋에 달아올라 있었고, 심장은 빨리 뛰었다. 맥주의 첫 모금은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지만 맥주 한 캔은 가슴에서 열이 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잘 취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노트북을 덮어었다. 그리고 이불 위에 누웠다. 큰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쉬었다. 불콰해진 얼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크게 나는 소리는 아니었고, 간간히 새어나오는 소리였는데 이곳에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소리였다.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간격을 두고 털털 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창문 있는 쪽으로 몸을 향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까보다 선명하게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차가운 현관문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현관문의 차가움이 싫지 않았다. 나는 현관문에 온 몸을 밀착시키고 될 수 있는 대로 귀의 모든 신경을 바깥에 집중시켰다. 소리는 미세했지만 확실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소리가 내가 짐작하고 있는 그 소리가 확실하다면 지금 이 소리가 나는 방에서는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화장실의 작은 창을 열었다. 화장실 창문을 복도 쪽으로 뚫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소리가 TV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TV에서 나는 소리는 특유의 전파 소리와 함께 하지만 실제로 나는 소리는 그런 전파 음이 없이 날것으로 생생하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집중했다. 소리는 분명히 맞은편 205호에서 나고 있었다. 소리는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는데 꽤 규칙적이었다.

그 소리는 분명히 여자의 신음소리였다. 여자는 어떤 율동을 반복하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거친 숨소리를 내기도 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남자의 숨소리도 있었다. 이건 분명히 케이블 TV에서 새벽 2시면 틀어주던 성인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지금 205호에서는 그 성인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 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창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후다닥 변기 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몰래 지켜 본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 거렸다. 나는 두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믿을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2층에 사는 사람 중에 학생이 아닌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205호에는 분명히 나보다 어린 여자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방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났던 거지? 나는 이내 불쾌해졌다. 어린 것들이 발랑 까져서는. 나는 일어나 불을 끄고, 이불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도 한참 이불 속에서 뒤척거린 다음에야 잠이 들었다.

저녁 늦게라도 집에 오라는 전화가 왔다. 어제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전화를 받았다. 유선이가 휴가를 나오는 날이라고 했다. 유선이는 4살 아래 동생이다. 유선이가 군대 가는 날 우리 가족은 새벽 6시부터 일어나 가족 드라마를 찍었다. 아침상과 어울리지 않게 불고기며 잡채 등이 올라와 있었다. 겨우 눈을 뜨고 식탁 앞에 앉아서 밥을 한 술 뜨자마자 엄마는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내자식이 의기소침할 것 없다며, 씩씩하게 다녀오라고 했다. 정작 유선이는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원래 말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든든한 가장을 연기하셨던 아버지는 방위를 나오셨다. 그 모든 억지 연출이 보기 싫어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유선이는 친구가 함께 가기로 했다며 더 이상 나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고, 아버지는 유선이의 주머니에 만원 몇 장을 찔러 주었다. 나만 슬리퍼를 신고 유선이를 따라 나섰다. 유선이는 집을 벗어나자마자 담배부터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유선이를 따라 갔다. 지하철 역 앞에서 유선이가 멈춰 섰다. 나는 잘 다녀오라고 말하고 유선이의 까슬까슬한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집에 가끔이라도 와. 너무 발 끊지 말고."

유선이는 짧게 말하고 돌아섰다.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가는 유선이의 뒷모습이 그렇게 서글프지는 않았다. 유선이는 어릴 때부터 용감했다. 그렇게 군대를 갔던 유선이가 오늘 첫 휴가를 나온다고 했다. 그래도 처음 나오는 휴가인데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부러 물을 차갑게 틀고 떨어지는 물속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다. 단단한 얼음으로 머리를 내리 친 듯 머릿속이 얼얼했다. 기차시간표를 알아보고 택시를 탔다.

기차역은 토요일이라 사람들로 붐볐다.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들은 한가득 배낭을 메고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이 손을 잡고 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아줌마는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시계를 올려다보며 막아 놓은 유리문이 열리길 기다렸고, 도착한 사람들은 역을 빠져 나가 택시를 잡기에 바빴다. 표를 끊고 역 안에 있는 매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샀다. 아침도 먹지 않고 그냥 나온 것이 생각났다. 곧 유리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짐을 들고 기차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6호차에 올라탔다. 내 좌석은 창가였다. 몸을 깊숙하게 묻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다행히 아까 모여 있던 등산객들은 기차의 다른 칸에 탄 모양이었다. 등산객 아저씨들처럼 기차 안에서 시끄러운 사람들도 없었다. 물론, 빽빽 울어대는 아이를 데리고 탄 엄마도 마찬가지다. 기차 안에서 우는 아이들을 만날 때와 누구 목청이 큰지 내기하는 아저씨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마이크를 대고 그만 입 다물라는 방송을 하고 싶어졌다. 다행히 내가 탄 칸은 무리지어 온 사람들은 없어 보였다. 나는 의자의 등받이를 알맞게 조절하고 머리를 기댔다.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고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우유를 마시며 창밖을 보자니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들떠 있었다. 대부분 웃고 있었고, 옆 사람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토요일에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설레임을 안고 있었다. 주말에 기차역은 언제나 비슷한 풍경이다. 이것은 내가 처음 이곳에 왔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바나나 우유를 비우고 나는 잘 준비를 했다. 언제나 똑같은 멘트의 안내 방송이 나오고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에서 내려서 나는 열쇠를 받기 위해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기차가 움직이고 얼마 있지 않아 스르르 잠이 들었다. 기차를 타는 일이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일처럼 흔한 일이 되자 기차를 타면 어느 순간부터 잠이 쏟아졌다. 몸을 깊숙하게 기대고 있으면 어느 순간 기차에는 잠의 기류가 흘렀다. 어느 순간 주위를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에 취해 사람들은 혼곤한 낮잠에 빠졌다. 잠이 깰 때쯤이면 신기하게도 얼마 후에 내가 가는 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곤 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매 만지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엄마가 있는 곳 까지 가면서 내일 몇 시쯤 기차를 타야 할지 생각했다. 집에 가면서 언제 집을 나올지 생각하는 것은 습관 같은 것이었다. 집을 무사히 빠져 나올 계획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어쩐지 불안해 지곤 했다.

엄마가 있는 곳은 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였다. 엄마는 주말마다 그곳에서 강의를 한다. 엄마는 웃음치료사다. 웃음 치료사라는 우스운 이름을 들고 엄마가 등장한 것은 몇 해 전이었다. 엄마는 원래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 나름대로 소극적으로 동네에서, 학교 어머니 교실에서 종종 나설 일을 찾다가 적극적으로 나서 보기로 작정 한 것이었다. 얼마간 강의를 들으러 다니더니 웃음 치료사 수료증이라는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 종이의 위력은 대단했다. 엄마는 방문을 닫고 웃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큰 소리로 하하하 웃기도 했고, 입을 모으고 호호호 웃기도 했다. 길게 끊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웃는 것도 연습했고, 입을 벙긋 거리며 미소 짓는 것도 연습했다. 그리고 엄마가 적어 놓은 노트를 들고 몇 시간씩 강의 연습을 하기도 했다. 엄마가 그 모습도 당당하게 첫 강의를 나가던 날 엄마의 자신감 넘치던 뒷모습을 기억한다. 엄마는 하얀색 쉬폰 소재의 리본을 크게 맬 수 있는 블라우스를 입고, 날렵한 H라인 검은 치마를 세련되게 받쳐 입었다. 백화점에서 옷에 맞춰 구입한 앞코가 번쩍거리는 에나멜 구두까지 신고 엄마는 턱마저 높게 들고 또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을 빠져 나갔다. 나머지 식구들은 병풍처럼 식탁 앞에 앉아 그런 엄마를 바라봤다. 분명한 것은 가족 중에는 누구도 웃지 않았다.

남 앞에 나서기 위해서 엄마는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는 사람이었다. 저녁마다 헬스클럽에 가서 런닝머신을 40분 이상 뛰어야 했고, 토요일이면 단골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고, 손톱을 손질해야 했다.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구두를 발견하거나, 엄마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발견하는 날이면 엄마는 하루 종일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거실을 맴돌았다. 거실에서 맴도는 시간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엄마가 그것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을 연출한다는 의미 외에는. 결국 엄마는 빚을 내서라도 그것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웃음 치료사로 강의를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버지는 옷은 제발 사지 말라는 말을 제일 처음 했다. 엄마는 알았노라고 했지만 그날 아침 엄마가 입었던 옷은 우리 가족 모두 처음 보는 옷이었다. 엄마가 웃음을 강의 할수록 우리 가족들은 웃음이 사라졌다. 엄마가 집에서 웃는 것을 연습할수록 가족들은 무표정이 되었다. 밖에서 엄마는 웃음으로 누군가를 치료할지 모르지만 가족들은 웃음 때문에 병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웃음 치료를 시작했고, 그 일이 엄마의 적성에 딱 들어맞았는지 몇 년 째 그 일을 계속 해오고 있었다. 엄마가 일하는 문화센터 앞에 도착했지만 선뜻 들어가는 일에 겁이 났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집에 와 있다가 엄마가 자료를 놓고 갔다는 말에 문화센터로 심부름을 간 적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강의하는 곳으로 들어갔고, 수업 도중 열린 문에 수강생들은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주말에 자아를 찾고, 나도 뭔가 배워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아주머니들 뿐 이었다. 당황한 것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다. 엄마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적고 있다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에게 왔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던 갈색 서류 봉투를 낚아채서 들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예의 그 강의용 목소리로 크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저희 사무실 직원이에요. 제가 오늘 여러분 나눠드릴 자료를 깜빡하는 바람에. 호호호 자! 이제 다시 앞을 보세요."

엄마는 종종 나를 딸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꺼리곤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엄마의 딸이라고 소개하기에는 너무 푹 퍼진 몸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딸도 엄마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액세서리처럼 아름답길 원했다. 하지만 엄마의 그런 바람이 커갈수록 나는 그 바람에 역행했다. 하지만 사무실 직원이라는 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 반가울 턱이 없었다. 나는 문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얼마간 문 앞에서 더 기다렸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더니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수업 시간 동안 배운 웃음을 연습이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에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 쥐색 코트 갖다 버리라고 언제부터 얘기했니? 10년도 더 된 코트를……. 집에 가면 당장 갖다버리고 하나 사!"

엄마는 나와 손이 닿지 않겠다는 듯이 열쇠를 내 손 위로 떨어트렸다. 나는 코트 깃을 여미고 돌아 섰다. 나는 엄마를 만날 때 마다 이 쥐색 코트를 입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10층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아파트의 오래된 흔적만큼 많은 스티커들과 전단지로 어지러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복도를 지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철커덕 문이 열리고 남의 집에 들어가 듯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유선이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집은 내가 다녀 간 몇 달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사람 냄새 대신 엄마의 향수 냄새가 진동하는 그대로였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위에는 뽀얀 먼지가 두껍게 내려 앉아 있었다. 내가 다녀간 후로 누구도 내 방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침대를 빼낸 자국은 아직도 크게 남아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가 침대를 빼낸 그곳에 천천히 앉았다. 바닥은 미지근했다. 기분 나쁠 정도의 차가움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바닥에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코트를 벗지도 않은 상태였다. 코트의 모자까지 쓰고 나는 벽에 딱 붙어 최대한 몸을 말았다. 어느 새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것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엄마는 현관에 놓인 내 신발을 보고 내 방문을 열었을 것이다. 웅크리고 있는 나를 보고 엄마는 쾅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 분명한 푸념을 시작했다.

"푸닥거리라도 한번 하던지 해야지 도저히 안돼겠어. 남편이고 자식이고 간에 궁상떠는 귀신들이 붙어서 집에만 들어오면 불도 안 켜고 저렇게 우두커니 있는데 내가 미치지 않고 배겨?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 복을 바라는게 잘못이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나는 방문을 열고 현관으로 나와 운동화를 반쯤 구겨 신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이 닫힘과 동시에 엄마의 트레이드마크인 높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선이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곳에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203호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며칠 전 들었던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도 분명히 205호에서 나는 소리가 확실했다.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이젠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술을 마시고 주정하는 소리라면 그냥 넘길 수 있겠지만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주인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줌마는 항상 그렇듯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저 203혼데요. 밤마다 205호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서 잠을 못자겠어요."

"이상한 소리?"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구요. 하여튼 너무 시끄러워요. 205호 원래 혼자 사는 거 아닌가요?"

아줌마는 곧 확인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4층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 아줌마의 슬리퍼 소리를 듣고 나는 집을 나왔다. 번화한 거리로 나갔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쓸려 걷다가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관 가득 퍼지는 팝콘 냄새가 고소했다. 영화관은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영화는 곧 매진이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나는 시간이 맞는 영화를 대충 고르고 표를 샀다. 한 장이요? 라고 다시 반문하는 매표소 직원에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는 흘끔 나를 쳐다보더니 영화제목과 시간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서 내민다. 나는 표를 받아들고 영화관 사람들 틈 속으로 다시 묻혔다. 영화는 크게 감동적이지도, 크게 지루하지도 않았다. 영화관을 나와 커피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거리를 메우는 사람들을 볼 때면 신기했다. 이 사람들은 주말이면 어떤 의무감을 가지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주말에 집에 있는 일은 실패자의 전형같이 느끼는 모양이었다. 혼자 거리를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둘 혹은 셋, 그 이상 많은 무리들이 이 상점에서 저 상점으로,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옮겨 다녔다. 한껏 멋을 부린 여자들은 언제나 눈에 띄는 맥도날드나 던킨도너츠 같은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쉽게 그녀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서 있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그녀들이 기다리는 사람들 중 남자들은 대개 허겁지겁 뛰어왔고, 여자들은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나는 가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던킨도너츠 앞에 서 있곤 했다. 그들처럼 연신 시계나 휴대폰은 보면서 초조한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흉내를 내곤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리 늦어도 30분 안에 그들을 찾아 왔고, 그들은 짝을 맞추어 던킨도너츠 앞을 떠났지만 나는 아무도 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싫증이 나면 기다리는 놀이를 끝내면 그만이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어가 장을 봤다.

노란 바구니를 들고 일주일 동안 먹을 반찬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속이 꽉 차 보이는 하얀 무를 보고 깍두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징어채도 한 봉지 담고, 호박이나 양파 따위도 담았다. 사과는 다섯 개에 삼천 원이라고 붙어 있었다. 큰 비닐봉지를 뜯어 사과 다섯 개를 신중하게 골라 담았다. 색깔이 너무 붉어도, 너무 푸르스름해도 담지 않았다. 멍든 곳은 없나 요리 조리 돌려 본 후에 다섯 알을 담고 마트 직원에게 내밀었다. 직원은 삼 천원이라는 바코드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얼마 담지도 않았는데도 바구니는 묵직했다. 계산대에 바구니를 올려놓았다.

"만칠천구백원입니다. "

나는 계산을 하고 포인트 카드의 숫자를 불러 주었다. 언제 모아서 쓸 수 있을지 모르는 포인트를 나는 꽤 꾸준히 모으고 있었다. 마트를 나와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는 몇 번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무나 사과 따위가 꽤 무거웠다. 어느새 거리는 어두워져 있었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뒤져 열쇠를 꺼내서 주택 안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열었다.

2층으로 올라가 현관문을 열려고 열쇠를 꽂는데 205호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205호 문이 열림과 동시에 튀어 나온 여자 아이는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넓은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모두 올린 여자아이의 얼굴은 동그랗고 하얬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나는 잘 깎아 놓은 배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녀의 얼굴은 배처럼 과즙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분홍색의 후드 티에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소리쳤다.

"언니가 말했죠?"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설마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2층에 사는 사람이 지금 둘 뿐인데."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열쇠로 문을 열었다. 205호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뭐하는 거에요?"

"언니가 말했냐구요? 내 말 무시하는 거에요?"

"내가 했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뭘 물어요?"

"책임져요!"

"뭘 책임져요?"

"언니 때문에 우리 오빠 나갔으니까 책임지라구요. 아줌마 내려와서

 난리치는 바람에 우리 오빠 나갔다구요. 어쩔거에요?"

205호는 나에게 바짝 다가서며 소리를 쳤다. 그 순간 나는 며칠 동안 쌓였던 짜증이 폭발했다.

"야! 너 몇 살이니? 너희 부모님도 네가 밤마다 남자랑 그러고 있는 거 아시니? 밤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205호는 하얗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눈에는 억울함으로 눈물이 맺혔다. 205호는 갑자기 몸을 돌려 현관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문을 열고 장 본 것을 다시 들었다. 내가 203호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았을 때 205호 문이 다시 반쯤 열렸다.

"차라리 너보다 어린 내가 남자랑 같이 있는게 부럽다고 해라. 새벽마다 창문 뒤에 숨어서 담배 피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너 같이 나이 들어서 궁상떠는 것 보다 내가 백번 낫다."

무섭게 말을 쏟아내고 205호는 재빨리 문이 부서져라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나는 손에 장 본 것을 든 채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205호의 목소리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버린 듯 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여자애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모욕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그녀가 눈앞에 들이밀며 이게 너의 실체라고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그녀에 대한 질투로 온 몸이 달아올랐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외롭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무너진다. 지금까지 잘 버텨온 것은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모른다고 세뇌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 싸구려 감정 따위는 내 안에 없다고 생각했다. 새벽에 담배를 몰래 핀 것은 감상에 젖어서가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나 자신과 타협하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커튼 뒤에 숨어서 담배 연기를 내 뿜었던 나를 언제 본 것일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203호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짐을 내려놓고 그대로 장롱에 등을 기대고 풀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그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소리를 내며 울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동안 가슴 속에 뭉쳐 놓았던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터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이 집에 와서 나는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울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울면 거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까지도 아깝다는 생각에 나는 절대 울지 않았다. 운다는 것은 나약함의 증거였다. 미련과 애정의 표시였다. 나는 당신들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다. 눈물을 보여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보지 못한 척, 듣지 못한 척 무시했다. 30분 동안 나는 온 몸으로 울었다. 205호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한 일은 내 눈물을 막고 있던 어떤 작은 돌 하나를 빼내 준 것 뿐이었다. 그 작은 돌이 빠지자 순간 모든 둑이 무너져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울다가 나는 그렇게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이곳에 와서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아주 깊고 깊은 잠이었다. 그리고 나는 꿈을 꾸었다.

나는 8살이었다. 작은 키의 나는 엄마가 사준 분홍색 구슬이 예쁘게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신발을 신고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달려간 곳은 코끼리 슈퍼 옆에 있던 공중전화 박스였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는 엄마가 맨발로 서 있었다. 아름다웠던 엄마가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맨발로 발을 포개고 서 있었다. 나는 엄마의 발 앞에 파란색 고무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고무 슬리퍼를 신고 엄마는 손을 내미는 나를 뿌리치고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나왔다.

"넌 이제 집으로 돌아가!"

"싫어. 엄마랑 같이 갈래."

"안돼! 넌 집에 가! 엄마는 절대 다시 집에 안가!"

그리고 엄마는 파란색 고무 슬리퍼를 신고 얼마나 빨리 뛸 수 있는가를 보여주듯이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엄마를 몇 발자국 따라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절대 뒤 돌아보지 않았다. 꿈에서 깼을 때 내 머리카락은 땀으로 이마에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몸은 바닥으로 꺼질 듯 무거웠다. 갑자기 현관 밑으로 불빛이 들어왔다. 복도에 센서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205호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205호의 문이 반짝 열렸고 205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다시 문이 닫히고 복도의 센서등도 꺼졌다. 다시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203호 안에 있는 모든 적막함이 나를 지그시 눌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