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이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미다스왕의 손을 거친 것처럼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나 연극 등은 모두 금으로 변한다. 그래서 감히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않는다든가 안성기나 배용준처럼 부드러워 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남성들은 여지없이 ‘간큰 남자’로 취급된다. 바야흐로 여성들의 시대가 도래했으니 흐뭇함에 젖어도 될 듯하다. 그런데 과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페미니즘은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전통에서 그 자체가 아니라 ‘결함있는’ 남성이나 남성 ‘아닌’ 존재로 간주되어 온 여성들의 권리를 회복하려 하거나 모든 형태의 남녀차별적인 억압에 저항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런 여성해방적이고 운동 저항적인 성격 때문에 유발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 중의 하나가 남성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하면 상처받은 이혼녀나 신경질적인 노처녀,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런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연관되면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은 협의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광의의 휴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부 여성의 인간화가 아닌 모든 인간의 인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여성의 희생 위에 기생하는 벌레같은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남성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증오심을 조장한다는 것이 그들이 비판하는 내용의 요지이다. 이처럼 분리주의적이고 단선적인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단적인 예가 박완서 소설을 둘러싼 논의이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이나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갱등의 여성소설에 대해 남성평론가들은 그 속에 그려진 남성인물들은 모두 비속화되는 반면 여성인물들은 성화되거나 가련화됨으로써 이분법적인 남녀 대립구조가 심화된다고 비판한다. 형편없는 남성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남성 자체가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다른 여성작가에게도 확대될 수 있는 비판이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차별’이 아닌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해방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평등하고 양성적인 인간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비판에 귀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싸움닭 같은 태도로 여성이 남성보다 무조건 우월하다고 우긴다거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으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혜정을 중심으로 한 여성계에서는 박완서 소설에 관한 담론을 통해 여성작가를 비하하고 여성 억압을 부추기는 비평의 일면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남성중심적 비평가들은 박완서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지리도 못난’ 남성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많은 여성독자들은 그들이 매우 ‘정상적인’ 남성상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비평가들이 여성작가의 비평을 꺼려하거나 잘못 평가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여성작가의 작품에 공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여성작가를 거론하면 비평가로서의 무게가 가벼원진다는 식으로 표출되는 잠재적인 여성비하 의식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은가의 문제보다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적대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를 보이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사실의 확인이다. 남성평론가들과 여성계 모두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만 다른 성에 대한 이해 부족을 서로 비판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여성의·여성에 의한·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인간의·인간에 의한·인간을 위한’ 페미니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토대로 한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에서도 초기의 여성이미지 비평에서 벗어나 점차 여성중심 비평으로 옮겨감으로써 자체내의 편협성을 극복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미지 비평이 남성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상투적이고 왜곡된 여성이미지에 주목함으로써 얼마간 남녀간의 적대관계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면, 여성중심 비평은 이런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전통에서 도외시되었던 여성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발견해 내거나 여성 특유의 글쓰기 방식과 여성 미학을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를 통해 대타의식에서 대자의식으로 확대·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물론 이처럼 남녀 공존이나 남녀 평등의 이상향을 제시하기에는 우리가 처한 현실 자체가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다. 여성을 억압하는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팝콘 비너스라는 용어에 나타나듯이 가슴이 큰 것이 여성 최대의 장점이 되는 문화가 판을 치거나 ‘젖소부인’ 시리즈와 ‘미란다’류의 연극이 성행하는 것은 10년·20년 전의 일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의 일이다. 또한 이처럼 여성의 성이 상품화되는 경향과 정 반대되는 것 같지만 사살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 바로 남성화된 여성상의 부각이다. 여성들은 이제 더이상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남성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다가가 키스를 한다. 다른 여성을 만나고 있는 애인에게 눈물을 모이기는 커녕 (물)총을 쏘아버린다. 문제는 이런 여성을 통해 여성과 남성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그 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위계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남성과 다른 바 없는 여성을 만들어 내는 사이비 페미니즘은 적 같지 않은 적, 친구의 모습을 한 적이기에 페미니즘에게는 더욱 무서운 적이자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페미니즘은 자신에게 걸려있는 마술을 풀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대포장된 거품을 빼야 할 과제를 안게 된다. 물론 이와 병행되어야 할 것이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일이다. 특히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까봐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이 남녀간의 대립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합법적으로 페미니즘을 거부할 빌미로 악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잘못된 페미니즘을 비판해야지 페미니즘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남성은 여성에게 밉지만 함께 가야할 동지이자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채무자들이기에 페미니즘은 아직도 유효하다. 하기에 정당하지만 두렵기도 한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빚쟁이다. 끊임없이 우리를 귀찮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