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에 밀려 국산 만화가 고전을 면치 못하던 1980년대 시절, 국내 만화계는 이현세와 허영만의 양강(兩强) 구도로 나뉘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허영만이 만년 2인자였을 뿐, 한번도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지 못했다는 사실. ‘공포의 외인구단’ (1986)을 필두로 ‘지옥의 링’(1987), ‘테러리스트’(1995-원제 ‘카론의 새벽’), ‘아마게돈’(1995)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 콘텐츠를 제공했던 이현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 만화계의 지존(至尊)이었다. 반면, 1970년대 말의 ‘철면객’(원작-각시탈) 이후, ‘48+1’(1995)로 간간히 영화 콘텐츠를 제공하던 허영만은 그나마 두 작품 모두 흥행에서 죽을 쑤는 바람에 좀처럼 가시밭길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영화 ‘비트’(1997)로 달라진 모습을 예고하더니 10년 간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타자’(2006)와 ‘식객’(2007)으로 이 시대 최고의 만화가로 우뚝 서게 된다.

글짱 시리즈에서 난데없이 허영만을 들먹이는 이유는 이번 주제가 ‘고증’(考證)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만년 넘버 투, 허영만이 한국 최고의 만화쟁이로 등극하게 된 원동력이자 비결이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가며 현장을 답사하고 철저한 사실 확인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허영만식 고증(考證)이 이야기에 탄탄함을 더하면서 그의 인생 가도 역시 탄탄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식객’을 비롯해 동아일보에서 절찬리에 연재되고 있는 관상 만화 ‘꼴,’ 부자들에게 돋보기를 들이대며 그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정밀하게 그려낸 ‘부자사전’ 등은 모두 꼼꼼한 취재로 사전 수준의 정보를 제공하며 세밀하게 복원해 낸 허영만표 ‘논픽션’들이었다.

글도 마찬가지다. 보고서를 쓰거나 영화평을 작성해도 고증(考證)을 토대로 글을 작성해야 탄탄한 내용을 이룰 수 있다. 고증(考證)이라고 하니, 어렵게만 생각하기 쉬운데 따지고 보면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인터넷이나 관련 서적을 뒤져가며 연관 정보들을 찾아내 수치와 명칭 등만 확인해도 고증(考證)은 고증이니까.

그러고 보면, 생생하면서도 구체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증(考證)이 필요하다. 이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소설가 조정래는 창작 활동에 따른 피로가 쌓이면 전국을 유람하며 머리를 식히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영감이 떠오르면 소설을 써나가야 했기에 트럭을 구입해, 짐칸에 한가득 자료를 싣고 방방곡곡을 돌아 다녔다.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라는 단어조차 낯설기만 하던 30여 년 전 이야기이니, 작품 활동에 필요한 고증(考證)을 위해 조정래는 움직이는 도서관을 몸소 끌고 전국을 유람했던 셈이다.

사실, 집필자의 시간과 정성을 배(倍) 이상 요구하는 하는 고증(考證)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질 수 없는 작업 대상이다. 하지만, 귀찮고 몸에 배지 않아서 사실 확인을 게을리 하며 뭉뚱그려 글을 쓴다면? 모르긴 해도 지금의 허영만은 없지 않았을까?

/ 심훈 교수(언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