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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 작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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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12.27  16: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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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종

어느 여인을 6년간 그리워하다가, 그 여인이 맞선 본 남자의 구애에 채 6시간도 못 되어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제서야 그는 한 번도 구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월은 빠르고, 여인들은 더 빨리 늙는다.*

그 비자림의 잎새들은 비비비非非非 손을 저었다
나는 그 처녀지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주위만을 서성거렸다
그 골짜기로 안개는 무장무장 피어올랐다
왠지 그 하나쯤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싸워서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이 없다는 건
무엇에든 싸워야만 한다는 사실보다 더 나쁜 것이기에

하지만 세월은 빠르고, 처녀들은 개간지처럼 환히 뚫린다


* 김영민, 『동무론』에서


내가 어릴 적, 그러니까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그런 게 있었다. “널 지켜줄게. 사랑하니까.” 그런 것. 서른이 넘고 보니 촌스럽게 들리는 말이지만, 또 모른다. 아직도 어린 남성들에게는 이런 류의 낭만이 숲처럼 남아있을지도.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군대에 가서 온갖 음담 패설과, 여성을 온갖 열매며 동물로 비유한 언어들에 물들기를 강요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욕에 가득 차 있던 군인 아저씨들에게도 누군가, 그런 내 모습을 감추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여자 한 명씩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시를 보고 떠오른 노래는 N.EX.T의 <인형의 기사 part1>. 어려서부터 지켜 봐오던 자신의 첫사랑이 어느새 자라 결혼을 하고 내 곁을 떠나간다는 내용의 노래다. 한번쯤 들어보길.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갖고 싶다.”와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지켜주고 싶다”가 남자에게는 공존한다. 그래서 어떤가, 하면? 생각보다 괴롭다. 하여 많은 남자들이 어느 시기가 되면 둘 중 하나의 욕망에 순응하고, 한 쪽의 욕망에 편향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쪽인가, 하면? 절대적으로 전자, “너를 사랑한다 그래서 갖고 싶다”로 기우는 것 같다.

진화된 모습 자체가 이상적인 모습을 장담해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기업화된 교회의 모습이 예수님이 땅바닥에 앉아 흙먼지 마시며 얘기하던 모습과 비교해 더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진화의 형태가 그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오늘날 기업화된 교회일수록 사람들이 가득하고 어쩐지 믿음도 득실거릴 것처럼 보이듯이 말이다. 남자들의 욕망이 “지켜주고 싶다”에서 “갖고 싶다”로 진화(?)되는 것도, 그게 더 연애 성공에 유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 방에서 여자와 잠을 자도 믿을 수 있는 순정파 짝사랑쟁이 남자와, 수많은 여자들을 사귀며 별 짓 다해본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할 때, 나라면 두 번째 남자가 연애에 성공할 거라는 데 돈을 걸겠다. 그런 일들이 주변에서 종종 벌어지기 때문에, 되고 싶은 자신의 남성상이 점차 여자를 잘 낚는 남자로 변해간다. 그 편이 더 실속 있고, 합리적이며, 즐겁고, 자랑할 수도 있고, 도시적이며, 무엇보다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 아픔을 피하고, 멍청해 보이는 짓을 피해가면서, 점점 사람의 감정은 이익과 효율성을 향해 진화하고, 사랑이라는 것에도 역시 이익과 효율성을 도입하고, 그러면서 시로부터는 멀어져 간다. 젠장…. ‘세월은 빠르고, 처녀들은 개간지처럼 환히 뚫린다’는 이 음담패설에 가까운 표현에 남자들의 슬픔이 담겨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렇게 예쁜 처녀들을 ‘개간’해간다는 생각에 나다운 사랑을 포기하고, 그 싸움터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를 다른 늑대들로부터 지켜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내가 이 여자를 먼저 가져버리는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등 떠미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사랑이 진화할수록, 그 사람들이 이루는 풍경은 더 슬퍼지는 것 같다.

/ 김원국(시인 · 국문학과 05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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