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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지학순 주교님을 그리며...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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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3.07  16: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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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복-김지하

원주역 바로 앞엔 해방촌

해방촌 바로 뒤엔 법원

법원 바로 옆엔 주교관

어느 그믐밤

은발의 주교님이 길을 가셨다

'할아버지 놀다가세요'

'놀 틈 없다'

'틈 없으면 짬을 내세요'

'짬도 없다'

'짬 없으면 새를 내세요'

'새도 없다'

'새도 없으면 탈나세요'

'탈나도 할 수 없지

옜다 과자나 사 먹어라'

어느 보름밤

은발의 주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하라고 악쓰는 세상

놀다가라니 이 무슨 축복!'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철학을 가르치시던 수녀님 한분이 계셨다. 어린 시절 띄엄띄엄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천주교를 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신부님을 짝사랑해 수녀가 될까 고민했던 누나의 방에서 성모상이나 묵주 등을 자주 접해 의외로 친숙함을 느꼈던 나는 첫 철학수업을 끝내고 삭막한 고교생활의 안식처가 어디인지를 이내 간파했다. 외따로 마련된 조용한 수녀실은 언제나 열려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미션'이란 영화에 빠져 반복해서 시청하고는 했다. 그때부터 수녀님은 나를 '프란치스꼬'라고 부르셨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인연으로 인해 나는 교리반까지 들었고 결국 '프란치스꼬'란 세례명으로 세례까지 받았다. 그리고 당시 나의 세례식 날 내 머리에 세례수를 부어주셨던 분이 김지하의 시 '축복'에 나오는 은발의 주교님이신 지학순 주교님이셨다.

어린 시절부터 '지학순'이란 이름 석 자는 내게 신부라기보다는 영웅의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어 몇 달간 고문을 받고 다시 원주로 돌아오던 날, 원주시민들이 원주역에서 원주성당까지 옷을 벗어 밟고 가시게 했다는 일화는 어린 내게 영웅의 전설을 듣는 느낌을 주곤 하였다. 김지하의 시에서처럼 지학순 주교는 매춘여성의 손짓을 축복이라 여길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당시 원주 학성동에 소재했던 주교관은 그 따뜻함에 이끌려 온 억울한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수배중인 지식인과 노동자들도 그를 찾았고, 그 덕에 주교는 늘 담당형사들의 미행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형사들마저 주교의 정다움에 빠져 본업을 잊고는 했다니, 그 따뜻함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그저 억울할 따름이다. 지학순 주교는 항상 자신을 종이라고 말하곤 했다. 교황이 종중의 종이니, 자신은 말할 것도 없다는 논리였다. 한때 나는 영화 '미션'과 지학순 주교님의 이 같은 매력에 끌려 외방선교회 신부가 되려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는 내 성장기의 든든한 배경이었다.

요즘도 난 원주역에서 내리면 주교관에서 멀지 않은 부모님 댁까지 지학순 주교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다. 원주역에서 주교관을 향하려면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해방촌의 끝자락. 촌락 여성이 웃으며 나를 부르곤 한다. 놀다가요. 이봐요, 재밌게 해줄게요. 얼굴이 붉어진 난 대꾸 없이 발걸음을 빨리하지만, 속으로는 '재밌게 놀다 가라니 축복이네'라고 실없는 혼잣소리를 한다. 불법 해방촌을 지나, 합법 원주법원을 지나, 법을 떠난 주교관을 지날 때면 나는 어김없이 걸음을 멈춘다.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故 지학순 주교. 나는 그의 손이 닿았던 내 이마를 가만히 짚어본다. 따뜻한 온기, 영웅의 손길이 닿은 곳은 그 흔적이 오래 남기 마련이다. 나는 그 흔적을 나를 지켜줄 해리포터의 보이지 않는 흉터처럼 평생을 소중히 간직할 생각이다. 바로 이 축복받은 세상에서.

 / 이현준(소설가 ․ 국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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