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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하루] 단계천을 거슬러 오르다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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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5.23  16: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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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끝나고

- 김용화

 

장마 끝나고

징검다리 하나 둘 모습 드러내면

시냇물 맑아져 송사리 피라미떼 줄을 짓는다

아랫내 물턱

큰물에 휩쓸려온 방개고무신 한 짝 걸려 있다

하늘이 푸르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버들붕어 한 꿰미씩 들고 곱돌모랭이 돌아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세월 속에 누렇게 바랜 내 오래된 사진첩엔 어머니가 하천에 앉아 빨래하고 계시는 사진 한 장이 있다. 그 사진 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하천을 배경 삼아 구멍 난 검은색 타이츠를 신고 해맑게 웃고 있는데 아마도 5살이나 6살쯤이었던 것 같다. 유치원에 들어갔던 7살부터는 내가 주위를 제법 또렷이 기억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만 해도 어머니가 수돗가에서 빨래하고 새로 구입했던 '짤순이'라 불렸던 탈수기에 옷을 넣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기 때문이다. 둘째 누나는 그 사진을 자신이 찍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알던 '단계천'이란 곳이 저렇게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나 하고 옛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원주 사람들에게 '단계천'은 몹시 생소한 곳이 되었다. '단계'하면 버스터미널과 유흥가가 몰려 있는 단계택지를 떠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단계천은 20여 년 전 감쪽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1978년에 원주교도소가 단계천 상류에 생기고 도시가 커지면서 단계천으로 흘러드는 오폐수 때문에 단계천은 복개공사를 고려하게 할 정도로 심하게 썩어갔던 것이다. 결국 1990년대 초에 시에서는 대규모 복개공사를 감행했다. 당시에는 환경에 대한 시민의 인식이 부족해서 내 기억으론 큰 반대 없이 하천을 빠르게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어린 아이들은 갑자기 생긴 넓은 놀이터에서 신나게 질주했지만 난 을씨년스러운 회색 광장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썩어가던 단계천이 그 어둠 속에서 어떻게 변해갈지 두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내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그곳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일방적인 결정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 몹시도 못마땅했다.

원주교도소가 단계천 상류에 생기고부터는 하천에서 빨래하거나 물놀이를 하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어른들은 부쩍 늘어난 악취와 부유물을 경계했는데 특히나 범죄자들의 배설물이 섞인 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노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일 년 중 유일하게 하천에서 노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바로 장마가 끝난 후였다.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가고 깨끗해진 하천에는 상류에서 내려온 송사리 떼가 보일 정도로 1주일 이상 예전 모습을 되찾고는 했다. 그래서 장마가 시작되면 나는 이미 장마가 끝난 이후를 생각했다. 동네 친구들과 둘러앉아 장마가 끝나면 어떻게 하천에서 물놀이를 할지를 의논하고는 했던 것이다. 팬티만 입고 첨벙첨벙 하천을 뛰어다닐 생각만 하면 잠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비가 와서 점점 불어나는 하천을 보며 장마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마는 쉽게 끝나지 않았고 그 사이 우리는 단계천이 선보이는 또 다른 볼거리에 빠져들곤 했다. 불어난 물 위로 떠내려 오는 세상의 온갖 것이 모인 곳 말 그대로 만물상 같은 곳이 되어버린 하천이 그것이었다. 바가지, 신발, 모자 같은 생활용품에서 호박, 오이, 수박 같은 하천 옆 밭을 훑고 온 것이 분명한 농산물 그리고 하이라이트였던 돼지와 고양이, 토끼, 개, 송아지 같은 동물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어른들이 위험하다고 하천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지만 동물구조대를 만들어서 올가미 낸 밧줄을 던지고는 했다. 물론 토끼 한 마리 제대로 건진 적이 없지만 우리는 독수리 오 형제처럼 번호와 이름 등을 정해서 나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가끔은 어른들 몰래 다리 위까지 찰랑거리는 물살을 헤집고 가서, 떠내려 오는 축구공 같은 쓸만한 물건을 건져서 그 전리품을 나누곤 했었다. 그렇게 장마가 지나면 우리는 햇빛이 부서지도록 물싸움을 하며 그다음해의 장마를 기약했다.

이제는 장마가 와도 복개천인 단계천은 빗물에 젖은 검은 색 콘크리트 광장만을 내보일 뿐이다. 청계천의 복구공사가 화제일 무렵 한쪽에서 단계천의 복구 이야기가 나왔다 사라졌고, 단계천을 근시일 내에 볼 일은 희박해져 버렸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아버지의 장화를 신고 내 체력이 다할 때까지 상류로 걸어 올라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땅끝까지라도 간 느낌이었지만 아마도 원주교도소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간 정도였을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난 특별할 것도 없던 그때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발밑에는 송사리 떼와 이름 모를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나는 갈대밭에 묻혀 불어오는 바람에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거리에 대한 걱정도 없이 나는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주저했었다. 마치 그 끝에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멋진 곳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복개되어 단계천을 따라 그 하천이 시작되는 곳으로 찾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유 없는 절망이나 힘겨움에 주저앉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장화를 신고,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한없이 단계천을 거슬러 올라가던 나를 기억하려 애쓴다. 진실로 믿건대 거기엔 분명히 행복이 있었으니 말이다.

/ 이현준(소설가 ․ 국문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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