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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반복은 죽음이지만 대부분의 시작은 미미하다영화 <취화선>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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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를 다룬 작품은 늘 흥미진진하다. 예술가의 드라마틱한 삶을 따라가는 것도 흥미롭겠지만, 그들의 창작 도구 즉 음악, 미술, 혹은 영화가 그들의 일상과 맞물리면서 일으키는 화학작용은 늘 관객의 기대를 자극한다. 임권택 감독의 거의 100번째 작품에 가까운 <취화선>도 <유메지>, <폴락>같이 화가를 다룬 작품과 마찬가지로 술과 여자에 취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원 장승업의 삶을 거침없이 그려 갈긴 작품이다. 캔버스는 곧 한국의 산수와 사회일 것이고, 바로 그 속에서 오원의 예술혼과 인생은 임권택 감독의 붓 끝을 통해 묘사되는 것이다.
아마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이력 중 가장 야심만만한 기획이라 생각되는 <취화선>의 도입부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있는 양반들에게 “일획이 만획이요, 만획이 일획이로다”라고 내뱉는 장승업의 모습은 40여 년간 영화를 마주 해왔던 장인으로서의 임권택 감독 자신의 출사표일 것이다. 이러한 과감한 연출 변과 더불어 <취화선>의 시작은 환골탈태한 임권택 감독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일본기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 플래쉬 백 되면서 장승업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은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시도임에 분명하다. 롱 테이크, 롱숏, 그리고 감정 선을 충분히 보여주고 끊어 들어가는 전작들에 비해, 도입부의 플래쉬 백은 짧은 컷들의 배열과 감정 선을 툭툭 끊어 들어가는 스타카토 리듬 편집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이후 이어지는 에피소드들도 이러한 스타일의 반복과 변주 속에 담겨진다. 예술혼을 불사르는 천재 화가 오원, 술과 여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극히 인간적인 장승업, 또한 동학명 혁명과 갑신정변 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전개되는 구한말을 살아야 했던, 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민초라는 각각 다른 모습의 캐릭터는 숨 가쁘게 이어지는 작은 숏들의 병치 속에서 형상화 된다. 이전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클로즈업과 팬, 틸트의 사용도 두드러지는데, 광기 어린 에너지가 화폭에 투사되는 과정을 보여주기엔 힘 있는 카메라 사이즈와 움직임이 필연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에게 반복은 죽음이야”라는 장승업의 말처럼, 변화를 모색했던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영화세계에 대한 판단은 아쉽게도 유보적이다. 결국은 빠른 편집과 리듬 속에서 보여주는 내용의 문제일 것인데, 내용이 별반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아킬레스건이 도사리고 있다. 익히 보아오던 천재 예술가의 삶이 고스란히 담기긴 했으나 그의 예술혼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장면이 빠진 느낌이다. 영화 포스터의 그림처럼 오원이 기와지붕에 올라 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이나, 그리다 만 그림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는 오원의 모습이란 관객들에게 감흥을 주기엔 상투적으로 보인다. 영화<샤인>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때 빠른 손가락의 움직임과 무아지경에 빠져든 제프리 러시의 표정을 빠른 인터컷으로 담아낸, 또는 <유메지>에서 작가가 그림의 일부가 돼 그림과 작가가 동화돼 버리는 ‘판타스틱’한 장면을 통해 작가의 철학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베스트 샷’이 <취화선>에서는 실종 된 것이다.
또 하나의 결함은 여성 캐릭터다. 장승업이 사랑했던 세 여인으로 나오는 진홍, 매향, 소운은 각기 뚜렷이 구별되는 캐릭터와 기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워낙 오원의 삶이 주가 된 영화인 것도 이유이겠지만 세 명의 캐릭터가 영화의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뜬금없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고나 할까?
구한말, 즉 감독이 <개벽>에서 이미 다뤘던 동학혁명, 갑신정변 같은 설정도 영화와 잘 동화 되지 않는다. 자막이나 김병문 같은 주변인물을 통해 감독은 끊임없이 <취화선>이 정치적인 알레고리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정작 감독이 설정한 장승업이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시대 설정에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캐릭터가 이러한 설정에 기능을 하려면 더 적극적으로 시대상황을 무시하던가, 아니면 뭔가 정치적인 발언을 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서편제>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았을 관객들에겐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새로운 임권택을 기대했던 평자들에겐 아쉽게 느껴질 작품이 <취화선>일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길소뜸>, <만다라>, <서편제>, <축제>같은 임권택 감독의 걸작이 10여 년 전쯤에 깐느에 초대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미 전성기를 넘어서서,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는 작가를 깐이 뒤늦게 발견하고는 공치사를 하고 있는 느낌이다.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긴 하지만 결과는 유보적인 <취화선>은 마치 발효가 덜된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신 느낌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작은 미미하지 않을까…,
/ 최인규 (본교 시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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