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국. ‘우리의 초, 중,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가’, 그리고 ‘한국미술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10대 작가 중 하나’. 그 외 유영국을 규정해 온 대표적인 수식어들로는 ‘한국의 제 1세대 추상작가’, ‘산의 작가’, 그리고 ‘침묵의 작가’가 있다. 실제로 유영국은 1930년대 후반, 일본유학을 통해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든 이후 2002년 작고 시까지 추상 하나만을 줄기차게 고집해 온 선구적 추상작가였고, 한국의 산천, 특히 고향 강원도의 산을 화면에 끌어들여 절대적인 추상미를 구현한 작가였으며, 시끄러웠던 우리의 근현대화단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묵묵히 화업에만 열중했던 작가였다. 

그러나 이 모든 수사들을 초월해 화가 유영국이 한국근현대화단에서 갖는 의의를 꼽으라면, ‘한국적 소재가 아닌, 유전자 속에 뿌리박힌 한국인의 정서를 통해 한국적 추상을 이루어 낸’ 화가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생전에 단 한 번도 자신의 화업에 대해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우리가 오늘 유영국의 그 이지적이고도 엄정한 추상 앞에서 뭔지 모를 공명, 혹은 감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내적인 파장을 느낄 수 있음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백자, 달, 학과 같은 ‘한국적’이라 규정되어 온 소재들을 통해 한국적 추상에 접근하였던 동시대의 작가, 김환기와는 좋은 대를 이룬다 하겠다.

유영국은 평소 무뚝뚝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정평이 나있었지만, 산을 주요 모티브로 하였던 자신의 추상작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그 성격을 규정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산은 자연이 부여한 하나의 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추상의 빈 그릇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가 베고 잤을 지도 모르는 산가(山家) 여인숙의 헌 베개 같이 축소 해석되어 한밤 내내 친근한 대화를 오가게 한다. (중략) 바라볼 때 마다 변하는 것이 산이다. 결국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것이다.”

결국 유영국은 어떠한 대상의 ‘사실’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하는 문제에 직면함에 있어, 나는 마치 사진과 같은 대상의 시각적 재현이나 묘사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 날,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그대로 마음속에 박혀버린 그 대상의 심상을 군더더기 없이 그려내는 길을 택했노라고, 그것이 나의 추상이라고 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1940년대 초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로는 평생 추상에 대해 몰이해했고 나아가 냉랭했던 한국 땅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작업을 지속해 온 유영국의 추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 과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 옛 문인들의 그림 그리기 방식과도 닮아있다는 점이다. 몇 개의 치밀하게 계산된 색면 이외에는 부재한, 내용을 유추해내기 어려운 그의 1960-70년대 절대추상들도 실상은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처럼 고차원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이 흐른 후 기억 속에 남아있는, 디테일은 사라졌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해진 단순한 이미지들에 대한 작가적 단상일지 모른다. 

필자는 언젠가 유영국 추상 속의 그 빛나는 세모나고 네모난 색면들을 보면서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의 은행나무 길을 걸을 때의 황홀했던 기억, 혹은 여름날 춘천가도를 달리다 창문 너머로 조우했던 짙푸른 초록 산의 청량감을 되살릴 수 있었다. 이 지극히 평면적인 이차원의 캔버스를 통해 나는 전시장 너머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우리네 산천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work>(1975) 같이 1970년대 후반부터 만년에 이르는 시기에 그려진 보다 완만해진 반추상의 그림들에서는 그 어느 인상파의 풍경보다도 우리나라 산천의 푸근한 정서가 절절히 전해진다. 

‘추상이 어려운가?’, ‘추상은 서구적 사유체계 속에서만 달성되고 공감될 수 있는가?’ 

미술평론가 최열은 “추상작품이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을 (이성적으로)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필자는 작품을 마주할 때 ‘보는 이의 마음’을 통해 작품에 깃든 ‘그린 이의의 마음 읽기’를 시도한다면 우리가 구상이니, 혹은 추상이니 하는 불필요한 영역짓기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열린 감상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유영국의 작품에서 어렵지 않은 추상, 그리고 한국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추상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  황빛나(본교 시간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