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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획과 점으로 근현대 역사를 토해내다한국의 초기 추상미술 4 - 고암 이응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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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근대라는 공간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한국미술의 뿌리, 즉 전통의 일면을 ‘추상미술’을 통해 들여다봤다. ‘추상’은 한 때 ‘전위’의 다른 이름과도 같았다. 20세기 서양미술사에 있어 ‘전위미술-아방가르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반항하는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태도에서 기인됐지만, 그 출발은 엄연히 전통에 근간해 있었고 따라서 ‘전위’가 ‘전통’으로부터의 분리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근대미술사에 있어 ‘전위’와 ‘전통’의 관계는 어떠한 모습이었던가. 35년간의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한국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은 지우고 새로 쓰는 단절과 청산의 역사를 반복했다. 수 천 년간 발전, 변화돼 온 우리의 문화적 전통은 문명화,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지워지고 일본식으로 번역된 서양의 전통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렇게 날조된 전통은 다시금 서둘러 청산돼야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작가들에게 있어 전통의 문제는 생존에 결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통에 대한 단일하고도 통일된 실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러나 사실상 해방공간에서 작가들이 재탐색 한 전통이란 일제강점기 형성된 향토색이나 야나기 무네요시 식의 비애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추상’이라는 전위적 조형언어를 택한 작가들 가운데 김환기, 유영국과 같은 이들은 기존의 사실에 근거한 재현적 미술전통을 극복하고 현대미술로 나아가기 위한 대안으로 ‘신사실’을 내세웠으나 결론적으로 ‘한국적’ 추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또 한편으로 동양화가들 가운데도 고답적인 산수화와 사군자풍의 답습을 계승하는데서 탈피해 전통적인 필묵과 조형관을 토대로 형상을 해체하고 기호화 시켜 서양의 추상과 흡사한 작품으로 나아간 이들이 있었다. 이전에 소개했던 지홍 박봉수와 고암 이응노 같은 작가들은 시서화일체론에 근간한 동양적 회화 전통에서 전위로 나아간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한 때 이들은 서체추상과 문자그림이라는 형식을 함께 공유했다. 그러나 박봉수가 유미주의적인 입장에서 세상에서 초탈한 작품으로 자신을 도피시켰다면, 이응노는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를 몸으로 부딪치며 이를 통해 작품을 성숙시키고 소재주의적, 형태주의적 전통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갔다.
고암 이응노(1904-1989)는 한국근대화단에 있어 미술이 사회적 발언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몇 안 되는 화가 중 하나다. 그는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15세 무렵 3.1운동 이후의 혼란을 틈타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20대의 고암은 1935년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전통 서화계의 거목이자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후학양성에도 힘썼던 해강 김규진(1868-1933)의 문하에 들어가 도제식으로 전통서화를 익혀나갔고, 당시의 일반적인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조선미전을 통해 화가로서의 출세를 꿈꿨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고암은 현실로 눈을 옮겨갔다. 수묵의 강렬한 운필로 한국전쟁의 비극적 실상을 그려낸 <피난민>(1952)과 <바가지A>(1955)와 같은 작품들은 고암이 피상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동양화의 영역에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고민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고암의 작업은 국내외 평단의 호평을 얻었고 1959년 독일로 떠나 다시 파리로 행선지를 옮기기까지 그의 화력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리고 고암은 파리에 머무른 동안 프랑스어 대신 한국어를 쓰며 외지에서 동양미술을 가르치고 콜라주 형식의 문자추상을 실험했다. 그러나 문자추상 자체가 각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양인들에게 한자, 혹은 한글과 같은 이국의 문자는 내용을 배제한 형상 그 자체로도 조형기호로서 소통 가능했고, 사실상 지홍 박봉수 등도 유사한 시기에 실험했던 문자추상의 아이디어는 고암만의 독자적 영역이라고는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67년의 동베를린 사건, 그리고 윤정희, 백건우 부부의 납치 사건을 계기로 옥고를 치르고 해외에서 유배와 같은 생활을 거듭하며 고암은 사회에 눈떴고 화폭을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구성해 나가는 ‘발언’으로 삼아 나갔다. 그리고 1980년부터는 타향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목도하며 기호화 된 무수한 수묵의 군상들이 춤추는 군무시리즈를 선보인다. 고암이 그려낸 군상들은 평화를 기원하는 하나 된 춤을 추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고암의 군상 시리즈는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려진 흑백의 기호 이상의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고암의 예술세계,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한국근현대미술의 명암의 역사와 같을 것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사회와 소통하는 하나의 매개가 됐을 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갈등이 가득한 우리사회에 이응노의 군상들이 벌이는 춤사위 한판이 던지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 황빛나 (본교 시간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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