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학의 원류로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일리어드’는 B.C. 7-8세기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양의 동서를 달리한다는 점보다 우리에게 더 낯설고 생경하게 다가드는 것은 어림해 3천 년의 시간을 격한 아득한 시간적 거리다. 인간의 이지가 여러모로 덜 깨이고 물질적 조건도 열악했을 테고 더구나 전쟁과 약탈이 으뜸가는 중대사였던 그 시대의 소산을 왜 읽어야 하는지 묻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얼마 전 TV에서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다룬 프로그램을 보던 중 한 구절이 귀에 박혔다. 현대는 죽음이 죽은 시대 또는 사회라는 요지의 멘트였다. 우리의 귀와 눈으로부터 죽음의 모습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차단되고 배제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장터나 납골당 같은 시설을 혐오 시설로 여겨 자기 주변에 두려 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 자체가 혐오 관념이 되어 경원 되고 소외되기에 이르렀다는 취지였다.

반면에 ‘일리어드’는 온통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전사가 전장에서 죽어가는 데 호머는 하나하나의 죽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꼼꼼하게 기술한다. 어떤 대목들은 너무나 끔찍하고 엽기적이어서 비위가 약한 독자는 욕지기를 느낄 수도 있다. 전쟁을 중심으로 돌아갔던 고대 전사사회에서는 그처럼 죽음이 너무도 흔하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전사라는 존재 자체가 죽음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가령 사르페돈은 자신이 목전의 전투에서 살아남고 그 후로 자신이 신처럼 죽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면 자신은 다시는 전장에 나서지 않겠노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눈앞의 전장에, 그것도 최일선으로 뛰어드는 것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머는 많은 전사 또는 영웅을 그리면서 그들의 무용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정작 그가 눈여겨본 것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스가 자신의 빼어난 무용을 믿고 총사령관인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게 고까웠던 나머지 “그대가 최고의 전사이긴 하나 그건 신이 그대를 그렇게 만드시었기 때문일 뿐”이라고 비꼰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듯 운 좋게 남다른 무용을 타고 태어난 걸 갖고 그리 뻐기지 말란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호머가 하고 많은 영웅 가운데 아킬레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건 이 같은 선천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과 같은” 또는 “신과도 견줄만한” 아킬레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인간이고 따라서 죽음을 면치 못하며 그런 그가 죽음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어떻게 바꾸게 되는가를 그만큼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호재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분노 이전의, 달리 말해 변모 이전의 아킬레스는 사람 죽이기를 우습게 안다. 아니, 많이 죽일수록 전사로서 그의 영광은 높아만 가니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랬던 그가 아가멤논과의 어찌 보면 사소한 다툼 이후 전투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한다. 아울러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고 그려본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깨어나 자신이 한 마리 벌레로 변해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미망에서 홀연 깨어난 아킬레스의 심정도 그와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결국, 아킬레스는 자신이 진정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나아가 적의 죽음에서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있게 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의 자존심은 뭇 인간들과의 공통된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한 줄기 불꽃이 창공을 솟구치며 찬연하게 타오른 후 어둠 속으로 스러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서 신과도 견주어졌던 아킬레스가 신이 감히 따를 수 없고 부러워할 만한 인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호머는 전쟁을 통해 그리고 아킬레스란 한 전사를 통해 삶의 의미와 인간의 조건을 묻고 탐색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인간의 하찮고 비참한 운명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 정녕 위대할 수 있음을 장엄하게 보여준다.

“왜 공부하는가”라는 물음에 많은 젊은이들이 졸업 후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답하는 것 같다. 구직난이 심각한 현실에서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열심히 한다면 기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노하는 아킬레스라면 그 같은 물음에 “공부가 재미있어서” 또는 “그냥 공부가 좋아서”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전국을 돌며 젊은이를 위한 콘서트를 벌이는 “시골 의사” 박경철이 소설가 조정래에게서 들었다는 말을 TV에서 전해 들은 게 생각난다. 우리는 이런저런 경우에 흔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데, 조정래는 자신의 노력이 스스로를 감동시킬 때 진정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풀이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삶, 참 지난한 경지이긴 하지만 그럴 때 사람은 참으로 용감해질 수 있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최대로 발현하는 게 아닐까. 그럴 때 아킬레스의 경우처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할 수 있을 것이다.

/ 김   번 (영어영문ㆍ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