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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책 한권] 책에 얽힌 젊은 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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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2.13  19: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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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는 지금까지 책을 가까이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릴 적에는 바깥에서 놀기를 좋아했고 책은 성적과 관련된 것 말고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워낙에 지적 호기심이 별로 없어서 지금도 그저 글 읽는 것이 즐거워서 또는 교양을 쌓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은 드물다. 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는 언어 문제로 전공 관련 서적 이외에 책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학위를 마치고 지금까지 역시 독서는 직업적인 목적에 국한된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에게 독서와 교양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마다 가슴이 뜨끔하다.

그래도 내게 책에 관한 추억이 없지는 않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20대에 그래도 내게 위안이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책이었다. 학교 벤치에서 커피숍에서 시내버스에서 집에서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들은 다양한 분야의 것이었다. 조선 말기나 ‘해방공간’의 드라마틱한 역사, 노동자 시인 박노해, 백무산의 전투적인 시나 김지하, 황지우의 천재적인 시, 나의 청년시절 방황과 방랑을 닮은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과 <젊은 날의 초상>, 황석영, 조세희가 소설로 전해준 민중들의 얘기, 베트남이나 니카라구아의 혁명사, 그리고 한국사회 변혁에 관한 다양한 논쟁들이 생각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친구가 병실에 있을 때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사가지고 갔었는데 그 친구가 그 시집을 보고 있어 우리가 같은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대학가 서점에서 예쁜 종이로 포장해주는 것도 적지 않은 재미를 주었다.

한 번은 건강이 안 좋아 치악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절에 잠깐 기거한 적이 있었다. 절에 가면서 배낭 가득 책을 가져갔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거의 기억이 없지만 게걸들린 사람처럼 하루 온종일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밤에는 촛불 아래서 책을 읽었는데 귀뚜라미, 나방 등 벌레가 불빛을 따라 수도 없이 날아와 앉아 있었다. 고시공부하던 또 다른 식객이 내 정체가 무언지 궁금해 했었다. 나처럼 요양을 왔던 한 여자 분이 주로 기도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과 대비가 되었을 것이다. 절에서 읽었던 책 중에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 등이 집필했던 창작과 비평사의 문학논쟁 서적, 종속이론에 관한 사미르 아민의 책,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소개한 차기벽의 책 등이 생각난다.

그 다음 해였던 87년 가을 나는 또 다시 건강이 안 좋아져 큰 수술을 하고 고향 집에 누워있게 되었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였던 상태라 음악 들으며 책 읽고 TV보고 가끔 친구들의 방문을 받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냈다. 역설적으로 내 몸은 꼼짝 못하게 되었지만 바깥은 민주화운동의 성공과 오랜만의 대통령 직접선거로 들끓고 있었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함께 출판되는 책들도 급진화되어 맑스주의 서적, 북한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권 한 권 출판될 때마다 사 보았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지루한 시간을 달래주기에 더 할 나위없이 좋은 책이었다. 이 책들은 지금과 달리 활기가 있었던 대학가 서점과 시대 서점에서 구입하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사다주셨던 것 같다. 항상 나를 믿어주셨던 분이셨으니 걱정이 되면서도 아들이 좋아하는 것이니 들어주셨을 것이다.

당시 내게 책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지적 호기심의 충족도 독서 자체를 위한 ‘순수한’ 독서도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교양으로서의 독서나 지적 생활을 내켜하지 않는다. 책은 무언가를 위한 무기였고 나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감동 때문에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병으로 몸이 묶여있는 상태로 읽었던 책들은 정의로운 세상이 금방 올 것 같은 희망과 조바심을 주었고 병석에서 일어난 후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게 하였다.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산 어느 시간보다 행복했던 이 경험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책이었다. 당시의 독서는 이후 내게 어떻게 남아 있는가? 사실 이 코너의 기획의도에 맞게 한 권의 책을 찾아보려 집과 연구실의 책을 살펴보았는데 당시 보았던 책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수시로 책을 다른 짐과 마찬가지로 버리거나 팔아버렸던 내 습관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 경우처럼 아쉬운 적이 있지만 ‘10년 안에 다시 꺼내보지 않을 책은 가지고 있을 필요 없다’라든가, ‘바둑에서 정석이 기본이지만 배우고 나면 잊어야 하듯이 책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등의 유치한 근거를 대며 최소한의 것만 간직하였다.

책이 남아있지 않듯이 책의 내용도 대부분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기억이 나는 책조차 전체적인 느낌과 몇 개의 단편적인 내용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나무에 준 거름 중 어떤 것이 잎을 피우고 어떤 것이 꽃을 피웠는지 알 수 없듯이 현재의 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평범하거나 어려운 사람과 사회의 삶과 투쟁에 대한 관심’이 내 청년시절 독서가 남긴 흔적일까?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 시절 읽은 책은 내게 무엇으로 남아있을까? 그리고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을 학생들에게 그 책은 어떤 걸 남기게 될까?

/ 엄한진(사회ㆍ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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