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눈이 많았던 겨울의 끝자락이다. 계절과 장소가 주는 시공간적 의미야 모두가 남다르겠다. 이러한 의미는 나도 예외는 아닌데, 올 겨울은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이제 대학 4학년이 되어 1년도 채 남지 않은 대학생활에 대한 아쉬움으로서 작용한다. 대학 4학년. 그 이름만으로 왠지 우울하다. 지금껏 100m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정신없이 달려왔건만 어느 순간 멈춰 서 숨을 고를 작정으로 뒤를 돌아보면 뭐하나 제대로 해 놓은 것이 없다. 그렇게 이제 내가 뛸 거리는 10m도 남지 않았다.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사회로 내몰리는 것 같은 기분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인문학을 전공한 학생으로서 느끼는 좌절감과 오버랩될 때 우울한 기분은 배가 된다.

  이러한 느낌으로 이 겨울, 나의 일상을 방황의 끝으로 스스로 몰고 가고 있을 때쯤, 우리 학교 인문학 연구소에서 ‘인문학의 위기’(발제자 : 홍성욱 토론토 대학 교수·과학사)라는 화두를 갖고 토론회를 연다는 사실을 알았다. 풀리지 않은 과제를 떠 안은 학생이 정답지를 발견하듯 반가웠고, 그래서 흔쾌히 시간을 내어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 날의 주제 였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토론회 참석을 계기로 나의 평소 느낌들을 정리해 볼까 한다.

  사실 이러한 거대한 주제를 학부생인 내가 발언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나름의 고민들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용기를 내본다. 기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인문학을 담당하고 있는 지식인 스스로의 책임이기도 하며, 그 피해당사자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인문학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는 인문학의 위기가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작용하여 발생될 결과라 생각한다. 우선 외부적 요인을 따져보자. 세계가-동시에 우리나라도-경제발전에 온 신경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실 인문학을 포함한 순수학문은 자신들의 자리를 응용학문에게 내 주어야 했다. 게다가 날로 천박해져 가고 있는 자본의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은 그 발전 속도에서 세상을 따라가기가 벅차 숨이 턱에 차는 듯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기의 원인규명 작업을 그친다면 그것은 절름발이식 모색이다.

  앞서 지적한 외부적 요인은 내부적 요인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상황에 맞게 적절한 발언들이 인문학 내부에서 쏟아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언제나 시대상황은 변화해 왔고, 그에 걸맞는 시대정신 또한 상존해 왔다. 그러한 시대정신에 걸맞는 현실발언을 했었던 지식인이 과연 몇이나 있었는가. 경제가 무너지고, 인문학의 위기가 대두되고 있을 때 이의 해결을 위한 목소리들은 왜 그렇게 작게 들리는가. 이런 지적은 지금껏 인문학자들의 연구경향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한 역사학자의 발언은 주목 할 만하다. ‘다수가 역사를 버린 이유는 역사가들이 다수와 소통되지 않는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희교, 「동양사 연구자들의 ‘객관주의’ 신화 비판」, 『역사비평』2000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p168 인용)

  이렇듯 위의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지금껏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독점해 왔으며 때문에 자신들의 동굴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데만 급급했을 따름이다. 동굴 밖의 세상 변화에는 무관심했으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발언 또한 들리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삶과 유리된 학문, 그리고 현실문제에 대한 안이한 태도로 인해 인문학 스스로가 위기를 자초한 셈이 된 것이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지금껏 인문학 지식인들은 자신의 지식과 유리된 삶을 살아 왔다고 지적하는 건 무리일까. 삶과 지식이 바퀴 굴러가 듯 동시에 진행될 때만이 빛을 발한다.

  나의 고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앞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라 생각되는 것이 바로 밥그릇의 문제라 생각한다. 밥그릇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무엇하나 풀리는 것은 없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매년 수많은 인문학도들이 대학의 문을 나서 사회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곳에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엄청나게 견고한 세상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들은 좌절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자신이 대학 4년 내내 배워 왔던 지식을 활용할 공간은 턱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이것은 다시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외부적 요인과 연결된다. 인문학의 위기 해결과 함께 밥그릇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발언도 공허할 따름이다. 이날 토론자들의 발언들 또한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인문학의 기득권자들이기도 한 토론자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리에 서 있기 때문이다.

/ 이시우(인문·사학·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