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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견문록]‘다이나믹 한글, 미래 없는 니혼고(일본어)’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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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2  10: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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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구소련의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비고츠키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불우의 천재였다. 결핵에 걸려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달 심리학을 중심으로 폭넓은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에게 학계에서 붙여준 칭호는 다름 아닌 ‘심리학계의 모차르트’. “놀아야 성공한다”는 모토로 유명한 김정운 전 명지대 교수가 소개하면서 회자되기 시작한 비고츠키는 또한, 심리학에서 변방에 속해있던 언어에 관심을 돌린 선구자로도 유명하다. 이전의 심리학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초점을 둔 데 반해, 비고츠키의 가설은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선험적인 요인이 ‘언어’라는 것. 이후, 언어가 다르면 사고가 달라진다는 그의 주장은 심리학에서 언어의 비중을 한 차원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게 된다.
  
존칭어를 통해 상대방을 공경하는 말이 한국어라지만 겸양어와 존경어가 극도로 발달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 상대방의 나이는 물론, 지위와 성(性)에 따라 쓰는 말씨와 어휘마저 다르기에 “처음엔 쉽지만 갈수록 어려워지는 언어”가 바로 일본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체류 당시, 도쿄(東京)의 어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필자의 선배는 어순(語順)이 같기에 금세 일본어를 익히는 한국 젊은이들의 유능함이 “건방진 일본어를 빨리 배우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렇듯 겸양어와 존경어가 빽빽하게 존재하는 일본어에 정중함을 나타내는 접두어, ‘오’와 ‘고’가 첨가되면 일상 대화는 복마전 같은 양상마저 띄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같은 난맥상에 한자까지 가세하면 일본어에 흥미를 나타내는 서양인들은 대부분 낙오되게 마련이다. 그런 일본어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할라치면 머리는 저절로 숙여지고 몸가짐과 옷매무새는 어느새 조심스러워지기만 한다. 반면, 부모마저 ‘유’(you)로 부르는 마당에 존경어란 말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영어에서는 당당한 태도로 상대방을 맞이하며 말을 섞게 되고. 해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저서를 통해 “한국의 경어법은 일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세밀하고 복잡하게 발달되어 있다”고 주장했던 이어령 교수의 일성(一聲)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느낌이다.
  
돌이켜 보면, 사용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비고츠키의 선구적 주장은 언어 인류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워프 등의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사용 언어가 사고방식뿐 아니라 행동까지 지배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수많은 문법 장치로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는 일본어는 대화자들의 행동거지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마물(魔物) 중의 마물이라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한껏 북돋기 위해 만들어낸 희대의 창조물이 일본어라면 필자만의 지나친 억측일까? 때문에 지금도 평등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평등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존재하는 곳이 열도라는 생각은 비고츠키의 주장 속에 더욱 힘을 받는다.
  
하지만, 일본의 미래를 내다볼 일본어의 백미(白眉)를 꼽으라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자판 입력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를 꼽아보지 않을 수 없다. 모음이 아, 이, 우, 에, 오 등 다섯 개에 불과해 모니터와 액정 화면에 ‘히라가나’를 입력할 경우 반드시 한자어로 바꿔줘야 혼동을 막을 수 있는 글자가 일본어인 까닭에서다. 일례로, 최근(最近)을 뜻하면 일본어의 발음은 ‘사이킹.’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또렷하게 구분되는 ‘세균’(細菌)과 ‘채금’(採金), ‘재근’(再勤)과 ‘세근’(細瑾) 역시, 열도에선 모두 ‘사이킹’으로 발음되는 것이 일본어의 현주소다. 참고로, ‘채금’은 금을 채취하고 ‘재근’은 다시 근무하며, ‘세근’은 세세한 예의범절을 뜻하는 한자어들. 해서, 복모음 ‘외’ 등을 비롯해 ‘애,’ ‘에’ 같은 단모음의 부재는 그렇게 웬만한 단어들이 4~5개의 동음이의어를 지니도록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 전화로 문자라도 보낼라치면 먼저 ‘히라가나’를 입력한 다음, 해당 글자들을 활성화시킨 상태에서 변환키를 눌러 수많은 유관 한자어들 가운데 적확한 한자어를 찾아 변환시킨 후, 다시 다음 글자로 옮겨가는 수고를 요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한자어를 모르면 적절한 의미를 액정과 모니터에 전달조차 못 하는 곳이 열도의 현실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동음이의어들이 난무하는 일본어를 어떻게 정확하게 알아듣고 해독할 수 있는지를 물은 필자에게 일본어 선생은 “아이마이노 겐고가 니혼고”(애매모호한 언어가 바로 일본어)라는 말로 화답해 주었다.
  
한 번에 입력하지 못하고 매번 해당 한자어를 찾아 일일이 바꿔가며 글을 진행해야 하니 문서 작성 시간이 마냥 늘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실제로 일본어로 A4 용지 한 장을 작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분이면 넉넉한 한글과 달리, 1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더욱이, 한글 문서는 자판을 외우기만 하면 키보드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눈으로 원고를 읽어가며 베껴 쓸 수 있지만 일본어는 한자 자체를 찾아서 입력해야 하는 까닭에 반드시 눈을 모니터에 고정시켜야 하는 제약이 버겁기만 하다. 결국, 꼼꼼하고 천천히 일을 처리하는 일본인들의 사무 특성상, 일 처리는 더욱 느리고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아니,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 같은 언어적 특성이 오히려 일본인들로 하여금 부지런하지만 느릴 수밖에 없는 일 처리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필자의 큰 아이를 담당했던 일본 소학교 담임선생님의 퇴근을 저녁 7시에 우연히 목격했던 광경은 일본 체류 초기, 충격 아닌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 오후 3~4시면 이미 퇴근하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교사들을 익히 보아오던 터라, 일반 직장인들처럼 저녁때까지 학교에 남아 잔무(殘務)를 처리하던 소학교 선생님의 모습은 당시, 생경 그 자체였다. 물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 필요한 제반 사항은 모두 유인물로 만들어 교장, 교감의 결재를 받은 후 학생과 학부모에게 나눠주는 문서 왕국의 풍토 역시, 이 같은 현상에 일조했겠지만.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지난 수 세기 동안 열도에서 통했던 이 같은 방식이 아직도 대세로 작용하는 일본에서 필자가 느낀 단상은 21세기의 ‘다이나믹 코리아’를 일본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웃인 한반도에서조차 갈수록 찬밥 신세가 돼가는 언어가 일본어라는 현실은 가뜩이나 불투명한 열도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만들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에 제 2외국어로서의 중국어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가운데 경제 침체 및 방사선 유출 등 온갖 악재로 열도의 ‘일본어가 벚꽃처럼 지고 있다’고 표현한 어느 신문의 기사는 더욱 아련하게 와 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ㆍ일 양국 간의 언어를 둘러싼 명암이 그 어느 때보다 극명하게 교차되는 시기가 작금(昨今)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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