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가 끝날 때쯤 해서 하는 일이 있다. 해당 학기에 매체를 통해 상영 혹은 방영되었던 영화나 드라마 중 학생들이 선호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영상스토리텔링과 제작을 담당하는 교수로서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학생을 접하다 보면 그들 개개인만큼 취향도 다양하고 호불호도 분명하기에 특정 작품을 꼽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통되게 좋아하는 코드가 분명히 있다. 지난 학기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주었던 영화와 드라마 중에 ‘신세계’와 ‘나인’이 눈에 띄었다.

  ‘나인’은 한 남자가 우연히 과거로 돌아가는 향을 얻고 시간여행을 떠나 운명을 바꾸고자 했으나 과거의 시간에 고립되어 버리는 네버엔딩스토리이다. 사랑, 죽음, 음모와 모략 등이 잘 차려진 한판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싶었다. 한편 이정재 주연의 ‘신세계’는 경찰이 조직폭력단의 일원으로 잠입하여 우여곡절 끝에 조직을 장악하고 보스에 오른다는 비교적 익숙한 스토리이다. 그러나 누아르 풍의 독특한 분위기와 걸출한 연기파 배우들의 호연만으로 흥행의 성공을 예단하기엔 내용 전개상 비약이 심하고 스토리가 헐겁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세계’가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회자되었을까. 몇몇 작품을 열거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지면상의 이유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드라마 ‘나인’과 공통분모를 통해 그 이유를 찾고자 한다.

  ‘신세계’의 주인공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조직 내의 정적들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그의 배후의 경찰의 비선라인을 와해시키고 급기야 운명적으로 조직의 보스로 등극하게 된다. ‘나인’의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운명을 바꾸려 하지만 시간의 틈에 갇히어 운명을 거스를 수 없게 된다. 이들을 아이러니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그들 앞에 닥친 운명 자체인 것이다.

  이 두 텍스트를 대학생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이 텍스트들이 운명론에 기반을 둔 스토리텔링임에는 분명하다는 점에서 힌트를 찾고자 한다. 기실 이미 많은 텍스트가 이 운명론에 기대고 있다. 대표적으로 막장드라마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일일 드라마가 대표적일 것이다.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운명이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많은 학생이 텍스트에 깔렸던 운명론을 소비하게 하는 욕망의 기제는 무엇일까? 혹은 운명론에 대한 욕망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할 수는 없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을 뭉뚱그려 살펴보면, 신자유주의로부터 촉발된 내면화된 경쟁의 피로감과 소외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20대들의 충동을 운명론이 채워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의 키워드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대표적인 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베버는 ‘신은 구제할 인간을 사전에 결정해 놓기 때문에, 노력에 상관없이 현세의 부귀와 사후의 구원은 전적으로 운명으로 정해졌다는 칼뱅주의적 예정설에 기인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역설적으로 그들을 운명론적 회의론에 빠지지 않게 만들었고, 오히려 그들 특유의 운명론적 선민사상과 자본주의가 절묘하게 융합되어, 금욕적인 삶의 실천과 노력의 경주를 통해 그들을 자본가로 성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물론 베버는 그 현상을 이성의 잣대를 대어 비판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글을 통해 세속적 삶을 살고 있는 생활인으로서 운명론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한 번쯤 고민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칼럼의 제목을 보고 이 지루한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어쩜 운명론자인 모른다. 운명론이라는 단어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였다면 이미 당신은 운명론자이다. 기왕에 운명에 당신을 맡겼다면 운명을 운영할 책임은 당신 몫이다. 운명론에 입각하여 보자면 우리는 모두 자기 깜냥만큼 대가를 치러야 하는 파우스트들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늘 그렇듯이 또다시 반복되는 너무나 낯익은 새로운(?) 일상의 시작이다. 그 일상 속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운명을 운영할 것인가 아니면 당당히 일탈할 것인가. 아무도 정답은 모른다. 그게 진짜 운명일지 모른다.

/이황석(방송통신ㆍ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