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발성기관의 모양을 따 28가지 자음과 모음을 만든 지 567년이 지났다.

  “우리나라 말은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에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다.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백성들은 이 글자를 배워 누구나 문자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라.”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세종대왕이 ‘어엿비’ 여기던 백성들은 시민사회의 주인이 되어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고, 초고속으로 발달해온 통신기술의 힘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대화와 주장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 심지어 ‘서당’에서 배우던 학생들이 수업 도중 ‘훈장’ 몰래 ‘카톡’으로 다른 서당의 학생과 소리 없는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다. 대화의 홍수 시대다. 

  문제는 각종 소통 채널에 범람하는 대화와 주장들에 의해 정작 우리의 말은 파도에 쓸려간 해변의 모래처럼 그 자취를 찾기 힘든 지경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소년 언어사용 실태‘를 조사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평균 20어절에 한 번꼴로 비속어ㆍ은어ㆍ유행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통 한 문장당 4~5어절로 계산해 본다면 평균 네다섯 문장마다 한 번꼴로 비속어를 사용하는 셈이다. 과거 남학생들의 또래간 대화에서나 들려오던 “존x"라는 수식어로 쓰이는 욕설은 이제 남녀 공용의, 욕설도 아닌 일상용어로 변한 느낌을 줄 정도다.비속어 뿐 아니라 축약어의 등장은 트위터ㆍ카톡 등 다양한 형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활성화에 힘입어 더욱 속도를 내는 느낌이다. 최근 언론정보학부 학생들이 참여해 발행되는 강원희망신문에서 학생 기자가 한글날을 맞아 취재한 바에 따르면 춘천 지역의 여고생들은 옆에서 들으면 그야말로 외국어로 착각할 정도의 말을 사용하고 있다. “버카충하고 버정가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편의점 문을 열던 이 여고생들이 한 말은 ‘버스카드 충전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가자’는 말이란다.

  대학생들도 이에 못지않다. 한림대생이라면 ‘핵교’라는 말에 익숙할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로 학교를 뜻하는 이 말은 요즘 대학생들에겐 ‘핵심교양과목’의 줄임말이다. ‘신긱’(신기숙사 건물) ‘구긱’(구 기숙사 건물) ‘빠바’(빠리바게트) ‘베라’(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 등 연령대가 다른 이들은 알기 힘든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말이 우리의 정체성을 살리는 기능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사회집단간 의미 전달을 위한 공통된 약속으로서의 언어의 기본 전제 자체도 그 뿌리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1997년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한글은 세계적으로 언어학자들로부터 그 과학성을 인정받는 우리의 ‘얼굴’ 중의 하나다. 이런 우리 자긍심의 귀중한 소재는 역사적으로 늘 홀대를 받아왔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문명대국의 글자인 한자를 두고 ‘상것들’ ‘아녀자들’이나 쓸 ‘언문’ ‘암클’을 왕이 만들어 공표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었다. 해방 후 원하든 원치 않든 맺어진 미국과의 ‘인연’은 영어의 우리말 ‘공습’을 유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SNS시대를 맞아 신기술로 무장한 신세대의 ‘은어ㆍ축약어 공습’을 받고 있다.  

 아름다운 순우리말의 발굴과 일상화에 정부가 과감한 재정 투자 등 힘을 쏟아야 한다. 교육 당국도 물론 이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개인들 또한 한글날을 맞아, “백성들은 이 글자를 배워 누구나 문자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라”던 옛 선조의 마음을 곰곰히 되새겨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