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3천 권. 어느 지역 도서관에 있는 책의 양이 아닌 나의 친형이 본인 집에 소장한 만화책 권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형을 이렇게 부를 것이다. ‘덕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덕후’는 일본어의 ‘오타쿠’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단어로, 어느 특정 분야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는 사람을 뜻한다. 원래 이 덕후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였다. 왠지, 덕후라 하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후줄근한 옷을 입은 남자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세라복을 입고 있는 여자 인형을 신줏단지 모시듯 품에 품고 걸어가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최근 덕후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조금은 약화됐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덕후라고 불리기를 주저할 것이다.

  이렇게 덕후가 나의 일이 아닌 듯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친구들은 나도 덕후라고 한다. 나도 2천 권 정도의 만화책을 가지고 있고, 학창 시절 만화가게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 대학 졸업 후 심각하게 만화 카페 운영을 고민한 적이 있다. 유학하러 갈 때도, 내 가방엔 전공 관련 책은 20권 남짓이었지만, 만화책은 100여 권이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만화책 한 권만 손에 들면, 20여 분 동안 세상의 온갖 일들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돼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나 스스로도 ‘아, 내가 덕후구나’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난 나를 스스로 덕후라고 부르진 않는다. 그냥 만화 애호가라고 부를 뿐이다. 덕후라는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다. 단지 내가 덕후라 불리기에는 그 내공이 낮기 때문이다. ‘(만화) 덕후’는 그냥 만화책 좀 읽었다고 아무에게나 붙여 줄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다.

  허락도 없이 마구 언급해 미안하지만, 내 형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자. 형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일본 만화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대학 전까지는 그런 부류를 거의 접해 보지 않았던 그는 한풀이 하듯 수많은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 한글 자막이 화면을 가린다는 생각이 들자,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요하게 일본어에 집중했다. 전공이 법학이었던 형은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고시촌에 들어갔다. 고시촌에서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1년 후 형의 손에는 사법 고시 합격증 대신 본인이 집필한 사법 고시용 일본어 참고서가 들려 있었다. 지금도 형의 만화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매주 50여 개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챙겨 보고, 수십 권의 만화책도 읽느라고 다른 일을 할 여력은 없다. 이동하는 시간을 이용해 만화를 보기 위해 운전은 절대 하지 않는다. ‘덕후’는 이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분야에 미친 듯이 쏟아 부은 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이들의 일명 ‘덕후력’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듯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 형은 지금 꽤 번듯한 신문사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법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경제부 기자이다. 경제에 대해  전혀 몰라 어려움이 많았었지만, 형은 만화를 정복하듯 경제를 정복해 갔다. 점심 먹는 시간 아깝다고 밥까지 걸러 가며 자신의 일에 집중해 갔다. 만화 보며 익힌 일본어 실력은 자신의 무기가 됐다. 일본통으로 통해서 일본과 관련된 일들을 대부분 담당했고 일본 특파원으로서 몇 년간 일하기도 했다. 만화에 대한 사랑도 더 전문적이 돼 만화에 관한 책도 두 권을 출판했을 정도다. 뭐 교보 문고 인기도서에 이름을 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덕후는 무엇이든지 그 분야에서 갈 때까지 가 본 사람인 것 같다. 그것은 그리 쉬운 길은 아니다. 그냥 조금의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갈 데까지 가 본 사람의 힘은 무섭다.

  요즘 세상은 대학생에게 모든 분야를 잘하는 슈퍼맨이 되기를 강요한다. 취업을 위해서 어찌 그리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지. 이러한 세상의 요구는 우리에게 덕후가 되기를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은 생각을 달리해 보자. 덕후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느 한 분야에서 끝까지 가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만 짜릿한 일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언젠가 나에게 큰 무기가 돼 있을 것이다.

/최훈 (심리ㆍ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