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전당, 지성의 상징, 진리의 상아탑, 학문의 전당, 학문의 요람, 낭만, 자유, 비판, 대학문화, 대학촌. 예전에 ‘대학’하면 떠오르던 단어들이다. 취업, 스펙, 영어, 해외연수, 경쟁력, 산학협력, 순위, 등록금, 아르바이트 등 새로운 키워드들이 주도하면서 잊혀간 말들이다. 그래도 오래된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가 모델로 삼으려고 하는 구미의 명문대학들은 지성, 자유, 비판을 대학의 핵심 가치로 여기고 있다. 

  이 오래된 가치의 측면에서 한림대는 어떤가? 우리 대학은 ‘작지만 강한 대학’, ‘마이티 한림’을 표방해왔다. 한때 ‘케어해주는 한림’이 강조된 적도 있었다. 지성, 학문, 전문성은 수업이나 독서, 고민, 학우들과의 토론,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 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중 전공 공부는 대학의 핵심적인 부분이자 지성인 또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필수요소다. 그런데 교수나 학생 모두 자신 있게 이 부분을 잘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번학기 사회학과에 1980년대 한림대를 다녔던 동문이 대학원에 입학했다. 늦깎이로 대학원에 다녀서인지 의욕이 대단한데 이 동문의 계획 중 하나는 학부생들의 전공 관련 독서를 도와주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개인적으로 그간 학생들의 취업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전공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것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떤 학과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고려됐다. 예를 들어 영문과 출신이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와 무관하게 문학적인 소양이나 교양을 가진 것으로, 법학과 출신이면 법률 관련 지식을, 공대 출신이면 다른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특정 공학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됐다. 지금 역시 전공 분야에 대한 탄탄한 지식은 장기적으로 유효한 경쟁력이다. 교수나 학생 모두 전공실력을 키우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자유나 낭만의 경우에도 유사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중고등학교보다 대학이 더 자유로운가?’ 이제는 이런 식의 질문도 가능할 만큼 대학에서 자유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갈수록 학생들의 말이나 글에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통제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늘어가고 있다. 개인적인 성취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대학생의 조건을 고려할 때 이러한 양상은 상황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학교에 따라서는 선진국 못지않은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중고등학교보다 대학 한림의 자유와 자율의 수준이 높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유는 개방적인 분위기의 일부 수업, 동아리에서의 토론, 학우들과의 잡담, 스포츠를 하는 드문 기회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갖가지 의무, 과제, 평가, 금지, 제재로 잃어버린 자유는 캠퍼스 밖에서의 다소 과한 음주문화나 SNS를 통한 의사소통으로나 회복된다. 민주화 이전 시기 대학생들은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대학 내부의 권위적인 제도와 문화를 개혁하는 학내민주화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민주화 이후 대학에서도 민주주의가 진전됐는데 최근 상황은 경쟁, 생존, 평가 등을 내세운 권위주의와 권리 침해 등 민주주의의 후퇴가 목격되고 있다.

  바람이 없고 쾌청한 이번 가을은 너무 아름다워 캠퍼스의 낭만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되뇌게 한다. 어느 대학 못지않게 예쁜 교정에서 생활하는 것은 한림인의 큰 자랑거리일 것이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스포츠가 몸과 마음, 그리고 사회생활에 주는 이점 때문에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노인이든 여성이든 생활의 일부가 됐다. 자연을 느끼고 사람을 만나고 꿈을 꾸는 낭만적인 삶 역시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와 구분해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교정의 벤치와 잔디밭에 가득히 학생들이 앉아 오만가지 얘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는 모습을 그려본다. 대학에 지성, 비판, 자유, 낭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주자. 대학이 가진 오래된 가치는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