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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볕도 영글게 느껴지는 하루, 가을을 느끼고 섰노라면 어쩐지 세상이 조신해지는 듯, 하늘도 철이 드는 듯, 사람들의 옷자락 마냥 우린 가을을 통해 한 해를 여밀 준비를 한다.
얼마 전, 아침 산행에서 산밤 몇 톨을 만났다. 숲길에 ‘타다닥’, ‘후두두둑’… 저희들만의 구호로 발길을 끌게 만들더니 이내 물기 촉촉한 먈간 모습을 드러낸다. 높은 나뭇가지 끝에서 여름 볕 견디며 누가 훼방이라도 놓을까 촘촘한 가시집 속에 숨었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의 삶도 쉽지는 않았을 듯싶다. 그런데 더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밤톨에만 눈독을 들이다 찬찬히 보게 된 밤송이였다. 폭신폭신 두툼한 쿠션감에 안락하게 느껴졌을 뽀얀 솜털, 그 안에서 포근히 안겨 오늘을 준비했을 녀석들이 또 다르게 여겨지는 것은 오늘 또 학교에서 마주할 밤톨만큼이나 반짝거릴 녀석들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너무도 포근해 보이는 밤송이로부터 세상 밖으로 몸을 던진 밤톨들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발길을 옮기며 문득 ‘늘 돌아오는 계절의 쳇바퀴에 우리가 너무 일상화되어 있는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흔든다. 생각해보면 세상이 아름답다는 찰나의 여유를 만끽하기엔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이 가을이었다. 하지만 그 가을이 추스르는 시점이 아닌 ‘독립’의 시점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조금 더 세상에 익숙해져가는 나이 탓일까?
누군가 그랬다. 나뭇잎은 제 할 일을 다 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조금은 애처로운 맘으로 바라보는 낙엽은 그리 쓸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 일을 온전히 마치고 그 역할에서 자유로워진 나뭇잎들이 이제 자력으로 겨울을 버틸 나무를 다독이며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일 테니 말이다. 낙엽은 나뭇잎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그렇게 잠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곤 또 다른 의미를 찾는 것이다. 누군가의 발걸음이 가을을 밟을 수 있도록, 새로운 양분으로 몸을 썩히고, 더러는 시간을 두고 보고픈 이들의 책갈피에 자리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낙엽에 견주어보니 땅을 밟은 밤톨들도 모두 제 둥지에서 몸을 키워 독립을 선언한 녀석들 같아 기특하게 느껴진다. 벌레가 차지하는 녀석, 다람쥐가 모셔가는 녀석, 사람들의 잰 손놀림에 배낭여행 하게 되는 녀석, 겨울 오기 전 부지런히 싹틔우는 녀석 등 각기 제 갈 길은 달라도 제 의미를 찾으려는 바지런한 움직임이 끊이질 않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가을은 분주한 독립투사들이 넘쳐나고, 새로운 시작이 단풍만큼이나 색색으로 넘쳐나는 계절인 것이다.
문득 나의 20대가 되살아난다. 사람들은 포근한 밤송이에 머물며 보편적 안정감을 추구하는 삶을 권했지만, IMF시절 취업한 안정적인 직장을 6개월 만에 접으며 국제행사 자원봉사를 떠나고, 배낭하나에 전 재산 털어 기약도 없이 훌쩍 둥지를 박차고 나선 당돌함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딱한 시선을 보냈던 때를 기억한다. 그 당시엔 내가 뭐가 되려고,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그래서 뭐가 달라졌는지를 딱히 세상에 보여줄 수도 없었다.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다만, 나를 찾고 싶었고, 세상이 궁금했고, 내 마음이 시키는 것이었다는 이유뿐이었다. 크게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 걸 보면 세상에 확인시키고, 인정받는 것은 그 다음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의미 있는 ‘독립’이었음이 분명하기에 이젠 낙엽도, 밤톨도 애처로움이 아닌 당당한 ‘독립’으로 비춰보는 것일 터이다. 나와 일상의 인연이 되어주는 학생들에게, 간혹 무언가 가렵기는 한데 어디가 가려운지 딱히 찾지 못하는 답답한 이들이 있다면 이런 제안은 어떨까 싶다.
출발선을 그어놓지 말라고 말이다. 이미 출발선은 일상 속에 언제라도 내 앞에 있을 수 있는데 남들의 출발선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 뛰어야만 그 시합이 인정받을 수 있다고 단정 짓는 까닭에 늘 부담스러운 건 아닌지 돌아보자. 가슴이 시키는 경기를 위해 출발선을 긋고, 내 자신이 경쟁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안락한 둥지에서 나에게 맞춰진 출발선을 고르고 기다리기 보다는 ‘독립’하는 밤톨이, 나뭇잎이 되어보자. 낙엽더미에 뒹굴어 보기라도 해야 싹을 틔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김윤정(경영ㆍ강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