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겨울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긴 하지만, 봄에 피어야 할 꽃을 겨울에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매운 바람 거세던 어느 겨울 날, 한 송이 매발톱꽃을 만났다. 화려한 생김새의 매발톱꽃은 유월 즈음에 피어나야 정상이다. 상황에 따라서 개화가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그때는 한겨울인 십이월이었다. 궁금했다. 가만가만 매발톱꽃의 애틋한 사정을 살펴봤다. 매발톱꽃이 자리한 곳은 다른 곳보다 높지막하거나 메타세쿼이아 그늘 아래였다. 세상의 모든 식물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는 종족 번식에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꽃을 피우고 열매 맺어야 한다. 식물은 그래서 꽃과 열매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 에너지는 식물 스스로 지어낸다. 광합성은 햇살과 공기와 물을 합하여 지어내는 식물 특유의 활동이다. 세 가지 가운데에 하나만 모자라도 광합성은 불가능하고, 광합성이 불가능해지면, 식물은 살아갈 힘을 잃는다. 꽃 피우는 건 언감생심이다.

매발톱꽃이 그랬다. 그 많은 자리 가운데에 하필이면 매발톱꽃이 뿌리내린 곳이 마침 햇살이 제대로 들지 않는 메타세쿼이아 그늘이었다. 햇살을 그러모아야 광합성을 해서 꽃 피울 에너지를 지을 수 있겠건만 매발톱꽃에 비쳐드는 햇살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여느 매발톱꽃이 화려한 꽃을 피우는 따사로운 봄날에도 그늘에 핀 매발톱꽃은 꽃 한송이 피울 에너지를 모으지 못했다.

하지만 여린 생명은 제게 주어진 운명을 한탄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퍼더앉아 수굿이 양분을 지었다. 살아있는 동안 여느 풀꽃만큼의 영화를 누릴 가능성은 이미 글렀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메타세쿼이아 그늘 사이로 실낱처럼 가늘게 비쳐드는 햇살 한 올 한 올을 정성껏 붙잡았고, 부지런히 광합성을 했으며, 차곡차곡 꽃 피울 영양분을 모았다. 그래봤자 가을 바람 불어올 때까지 매발톱꽃은 꽃 한 송이 피울 양분을 채 쌓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슬바람 불어오자 메타세쿼이아 큰 나무가 무성했던 나뭇잎을 붉게 물들이더니 한꺼번에 낙엽을 했다. 어둡던 풀꽃 주위로 햇살이 환하게 비쳐들었다. 이때다 싶었던 매발톱꽃은 더 부지런히 양분을 모았다. 그렇게 드디어 한 송이 꽃을 피울 만큼의 양분이 모아졌다. 매발톱꽃이 드디어 한 송이 보랏빛 꽃을 피웠다. 겨울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존재의 이유를 실현한 것으로 기뻤다.

아쉬운 건, 꽃의 목적인 꽃가루받이를 해 줄 벌과 나비는 이미 숲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엄동의 추위를 이겨내며 피운 꽃은 하릴없이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꽃가루받이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매발톱꽃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추위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풀꽃 한 송이는 그래서 기쁘고 풍요롭게 겨울에 맞서 장하게 섰다.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는 주어진 존재 이유가 있다. 그걸 단 한 순간도 잊거나 포기하지 않고, 수굿이 제 길을 가는 한 떨기 풀꽃송이에서 삶의 경건함을 배우고 또 배울 수밖에 없다.

/고규홍(디지털미디어콘텐츠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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