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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에서 밀 공급 실패는 제국 붕괴 알리던 서막스파르타, 그리스 유일의 밀 평야 지녀 최강의 육군 보유
한림학보  |  news@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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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0  11:5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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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엔 중동을 중심으로 서양 사회에 처음으로 도입된 밀에 대한 이야기로 물꼬를 터 보았다. 이번에는 인류의 문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원 전 1000년 경 이후의 서양사를 중심으로 밀에 대한 인문학 오디세이를 떠나보기로 하자.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스파르타가 최강의 육군을, 아테네가 최강의 해군을 가지게 된 이유로 밀을 꼽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서구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는 잘 알려진 대로 산악 국가. 국토 대부분이 산과 언덕, 구릉으로 이뤄져 있어 민족 국가로의 발전이 유난히 더뎠으며 결과적으로 발칸 반도 여러 곳에 집단적인 문명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도시 국가, 폴리스. 말하자면, 도시 국가의 탄생은 지리적 우연이 잉태한 그리스의 필연이었던 것이다.

산악이 많고 해안은 온통 도서로 덮여 있어, 발칸 반도에서 대규모의 곡물을 스스로 조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에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중계 무역을 통해 살 길을 모색했다. 내해(內海)라 부르는 에게해는 그리스인들의 안방이었으며, 아드리아해는 앞마당, 지중해는 삶의 터전이었다. 에게해와 아드리아해, 지중해를 넘나들며 이집트와 터키, 스페인과 이스라엘의 상품을 교환하는 중계 무역은 그들 손에 밀을 건네 주었다. 그리스가 지금까지도 세계 유수의 선박 왕국인 동시에 해양 강국인 이유다.

그런 그리스에서 유일하게 대규모의 밀 농사가 가능했던 지역이 바로 스파르타란다. 더불어 이 귀한 대지의 풍요로움을 지키기 위해 스파르타는 강한 군대를 보유해야만 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인류 역사상 최강의 육군이었다.

그리스의 바통을 이어받으며 서양 문명의 적자로 등장한 로마 시대에 이르러, 밀의 중요도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른 평야를 훨씬 많이 지녔던 로마는 식량 사정이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들보다 무척 좋았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당시, 서양인들에게 세계 제국이나 다름없었던 로마에 있어 가장 큰 골치 덩어리는 정작, 엄청난 수의 도시민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었다. 제국 안으로 몰려든 드넓은 식민지의 속주민들에서부터 제국 내 지방에서 상경한 백성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전쟁 포로들과 상인들은 언제나 로마의 먹거리를 부족하게 했다. 그리하여 식량 정책이 잘못 운용될 경우, 빈민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한 폭동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어버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안노나(Annona)’라는 식량 분배제도를 통해 로마를 비롯한 대도시 빈민층들에게 밀가루 등 식량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나누어 주었다. 인류의 역사는 돌고 돌기에 현대사에 있어서도 로마의 이 같은 식량 배분 정책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재현되곤 했다.

산업화, 근대화 정책을 시행했던 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은 도시로 몰려든 값싼 노동력을 기업들에게 대량으로 제공해 주면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근로자들이 식량 구입에서라도 곤란을 겪지 않도록 쌀값을 강제로 저렴하게 책정하였다. 이른바, 정부미 수곡 정책이었다. 물론, 농민들 역시, 쌀값을 제대로 보상받지는 못했다. 그런 까닭에 정부는 농민들로부터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쌀을 구매한 다음, 이를 더욱 저렴하게 도시민들에게 공급함으로써 적어도 쌀값을 두고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물론, 적자는 고스란히 정부 몫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미 2000여년 전에 로마 제국이 시행했던 ‘안노나’도 대규모 자금을 필요로 했다. 무려 100만 명 이상이 거주했던 초메트로폴리탄, 로마에 안노나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적을 경우, 10만 명, 많을 때는 30만 명을 웃돌았다. 그런 수혜자들에게 나눠주는 밀의 가격은 아무리 비싸도 시장 가격의 절반을 넘지 않았으며 많은 경우, 무료로 제공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간헐적으로 시행되긴 했지만 ‘안노나’ 제도 유지를 위한 로마 제국의 재정적 부담은 상당했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안노나’의 운용을 위해 해외에서 수입된 밀의 양은 많을 경우, 로마 전체 소비량의 50%에 달했다고 한다.

문제는 로마 말기에 토지 제도가 무너지면서 파산한 소작농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려오는 통에 빈민과 무산 계급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을 밀로 달래면서 로마의 재정은 더욱 열악해졌고 방위비에 대한 지출이 상대적으로 줄어들면서 국경 수비는 느슨해져 갔다. 훈족의 압박으로 로마 국경을 넘어온 게르만족이 결국,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던 밀로 인해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렸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고 보면, 20세기의 소련도 비슷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 정권의 등장으로 모든 사유 재산이 몰수당한 가운데 농민들은 집단 농장을 통해 공동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공동으로 수확물을 분배받아야만 했다. 자연히 농민들의 생산 의욕은 저하될 수밖에 없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소련의 밀 생산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 그 하이라이트는 1946년과 1947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당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가 흉년을 맞이하면 수억 명에 달하는 소비에트 연방 구성원들은 고통스러운 배급난에 처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소련의 독재자인 스탈린이 죽은 후, 등장한 흐르시쵸프는 스탈린의 곡물 정책을 격렬히 비난하며 자신만의 농업 정책을 펼쳐 나갔다. 나름대로 다양한 농업 정책들을 선보인 흐루시초프였지만 역시, 독단적인 결정과 경직된 사회주의 경제 구조 속에 소련 연방의 식량 상황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가 대대적으로 벌인 처녀지 개간 사업은 대부분 성과 없이 끝났으며 검증되지 않은 곡물 종자를 심었다가 모조리 실패하면서 소련의 농업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덕분에 소련은 그들이 가장 증오하던 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종종 대규모의 밀을 수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소련에 밀을 팔며 짭짤한 재미를 보던 미국은 소련의 대규모 밀 사재기로 1972년에 시카고 곡물 시장과 영국의 곡물 시장 밀값이 폭등하자 결국, 1973년에 의회의 승인 아래, 여타 주요 곡물들과 함께 밀을 전략적 상품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밀이 바야흐로 세계 정치와 경제, 안보를 주무르는 곡물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그 같은 선례는 이미 로마 제국이 잘 보여주었지만. 그럼, 다음 시간에는 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와 함께 빵 이야기를 펼쳐 보도록 하겠다.

/심훈(언론방송융합미디어 ·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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